너무나 가정적인 JP
너무나 가정적인 JP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7.06 11:38
  • 호수 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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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테말라 며느리와 손주 끔찍이 사랑해

김종필 전 국무총리(1926~2018) 영결식을 TV를 통해 보면서 그의 아들 김 진씨를 찾았다. 고인의 영정을 들고 있는 이는 김 진씨가 아닌 듯 했다. 며느리를 유심히 찾아보았으나 ‘과테말라 여인’도 보이지 않았다. 

김 진씨는 미국 유타대학에서 공부할 때 과테말라 처녀 리디아씨와 결혼했다. 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김 진씨 커플은 신당동천주교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김 전 총리는 아들의 국제결혼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집안의 내력일지 모른다”며 우스개 소리를 했다. 김 전 총리는 결혼식 날 “우리 김씨 시조인 김수로왕이 인도부인을 맞아 진작부터 외국분과 결혼하는 전통을 남겨서 인지 내 아들도 외국 사람과 결혼하게 됐다. 유학을 가 지금의 여자를 만난 모양”이라고 말했다.

고인은 손주들을 몹시 사랑했고 외국인 며느리도 끔찍이 위했다. 퇴근 길 아들네 집에 들러 손주들을 안아주는 일이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고인이 민자당 대표 시절 일화. 김종필 대표는 어느 날 베트남 한인 2세의 방문을 받았다. 당시 김 대표를 찾아온 라이 따이한은 6명. 라이 따이한은 베트남전에 참전한 한국 남자와 베트남 처녀 사이에 낳은 아이를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 중 아버지를 확인한 이는 2명이었다. 나머지는 아버지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이미 또 다른 가정의 아버지가 됐기 때문이다. 이들의 아버지는 군인이 아니고 대부분 기술자들이었다. 

이런 슬픈 사연을 알고 있는 김 대표는 라이 따이한들에게 “아버지를 만났느냐”고 묻고는 “아버지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은 나를 친아버지라고 여기라”며 진심으로 위로했다. 김 대표는 이어 금일봉과 시계를 주며 “태어난 환경은 그렇더라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꿋꿋하게 살아가기를 바란다”고 격려했다.

당시 민자당 대표실을 찾는 방문객들이 많았다. 대개 인사만 나누고 돌려보내던 것과 달리 라이 따이한들을 따듯하게 환대한 배경에는 혼혈 손주를 유별나게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 낳기만 한 채 떠나버린 한국 아버지들을 찾아온 베트남 혼혈아들의 가여운 처지가 남 일처럼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고인은 자상한 아버지이며 성실한 남편이자 애처가이기도 했다. 정상의 정치인들치고 구설수에 오르지 않는 이가 드물었던 시대였다. 그러나 평생 스캔들이 없었고 숨겨놓은 자식 같은 건 더더구나 없었다. 국립묘지에 안장될 자격이 있지만 그보다는 부인이 잠들어 있는 부여의 가족묘를 택했다.

기자는 1970년대 초, 젊은 시절의 JP를 우연히 보았다. 명동 제일백화점 앞에서 낯익은 남자가 가족들과 함께 쇼윈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고인이었다. 당시 국무총리였다. 브라운색 스웨이드 가죽 반코트를 입은 세련된 ‘미남 총리’가 화려하게 성장한 부인과 딸, 아들을 데리고 명동거리를 산책하고 있었다.

고인은 박정희 군사정권의 2인자이자 한일회담 주역 등으로 학생들에게 별로 인기가 없었다. 기자 역시 학생이었기 때문에 비슷한 느낌이었으나 명동에서 본 고인은 신선하게 느껴졌다. 신문에서 본 것보다 훨씬 잘 생겼다는 인상이 지금도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1980년대 고인의 딸 예리씨는 K그룹 설립자 막내아들과 결혼 후 이태원에 살며 홈데코 가게를 운영했다. 권력자의 딸이자 재벌그룹 며느리였던 그를 주위에선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들이 심한 병에 걸려 미국을 오가며 큰 수술을 했다. 이혼도 했다. 고인은 하나뿐인 딸의 장래를 가장 걱정했다. 전 정권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재산을 몰수당하고 보안사에 감금당하는 등 수모를 당했으나 그는 당당함을 잃지 않았다. 고인과 함께 정치활동을 했던 원로 정치인은 “그 무렵 JP는 정치적인 탄압보다 딸의 불행한 결혼이 더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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