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란의 편지를 받은 죽석은 색정의 유희라는 것이 위험한 것임을 느껴…
세란의 편지를 받은 죽석은 색정의 유희라는 것이 위험한 것임을 느껴…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7.13 11:30
  • 호수 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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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93]

미란은 미처 고맙다고 말을 할 사이도 없었거니와 그런 말이 그 자리에서는 쓸데없는 것으로 들릴 성싶었다. 아이가 이웃집에 가서 엿 한 가락 얻어 들고 뒤도 본체만체 달려오듯 미란도 결국 한마디 말도 보낼 여가가 없이 털고 자리를 일어서는 수밖에는 없었다. 처음에는 그 목적을 위해서 겸연쩍은 생각에 주저도 하고 망설이기도 한 것이 현마의 자발적인 호의로 그렇게 수월하게 해결되었을 뿐이 아니라 당초의 스스럽던 생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미란의 마음은 평온하고 떳떳한 것으로 변했다. 말은 없어도 감사의 생각이 가슴을 밀고 오르면서 좀 더 섰으면 눈물이 돌 것도 같아서 든손 문으로 향했다. 칭칭 감은 현마의 붕대가 돌부처의 새하얀 귀고리같이 가슴속에 배어오면서 미란은 더 뒤를 돌아볼 용기조차 없었다.
사람의 행복이란 어떤 길에서 찾아지고 어떤 고패에서 작정되는 것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길이 행복스럽게 보이다가도 저 길이 탐나 보이며 저 길이 탐나 보이다가도 문득 이 길이 행복스럽게 보이는 수도 있는 것이며―― 아니 저 길에 서면 이 길이 좋은 것 같고 이 길에 서면 저 길이 행복되어 보이는 것이다. 행복을 구해서 헤매이고 갈팡질팡 설레는 것이 온전히 그 까닭인 것이나 그러나 행복이란 그것만으로는 형상을 잡을 수도 없고 종적을 가릴 수도 없다. 불행 속에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자기의 불행을 느끼지 못하듯이 행복 속에 사는 사람이 반드시 그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적도 있으며 되려 게정을 부리다가 일껏 온 행복을 손안에 들었던 미꾸라지같이 놓쳐 버리는 수도 있다. 불행과 마주설 때에 행복을 행복으로 느낄 수 있음은 행복과 대립될 때 불행의 맛이 알려지는 것과도 흡사하다. 이편이 불행할 때 저편이 행복되어 보이고 저편이 불행할 때 이편의 행복이 몸속에 사무치게 느껴지는 법이다. 피서지에서 문득 세란의 편지를 받은 죽석의 심경이 바로 이 경우에 속하는 것이었다. 세란의 편지 속에 자세히 적혀 있는 최근 푸른 집에 일어났던 변괴에 죽석과 만태는 크게 놀라며 세란들의 불행을 뼛속에 배이게 느끼는 한편 오랫동안 잊었던 자기들의 행복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하기는 자기들과 세란들의 두 경우에 어느 편이 행복스럽고 어느 편이 불행한 것인지――자기들이 행복스러운 편이고 세란들이 불행스런 편인지는 일률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나 죽석은 적어도 자기들의 경우를 행복스러운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이다. 그도 한때는――이것은 그만의 마음의 비밀이요. 남편 만태에게도 고백하기 어려운 속뜻인 것이나――세란의 신세를 부러워하고 그가 세상에서 아마도 가장 행복스러운 여자라고 느껴도 보았다. 피서의 전반기 만태가 아직 별장에 오기 전에 세란들과 술을 먹고 춤을 추고들 했을 때 밤중이면 세란이 자기의 방에 살며시 숨어들어 색정의 진의를 설명하고 실감을 말하면서 한 사람의 남편과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수절한다는 것이 천치의 증거라느니 하면서 소군소군 들려주는 말이 천사의 말도 같고 딴 나라의 유혹도 같으면서 사실 자기는 바보일까 천치일까 하면서 의혹도 해보고 번민도 해보았다. 그러던 것이 지금 와서 우연히도 세란들의 불행으로 말미암아  그 한 때의 뜬 생각도 변해지며 세란이 반드시 최대한도로 행복스런 처지는 아니라는 것, 색정의 유희라는 것이 도시 위험하고 걱정 많은 것임을 느끼면서 자기들의 자극 없고 무미한 생활을 다시 한번 고쳐 반성해 보게 되었다. 그 결과 그 깐에는 자기들의 단조한 생활이 결코 불행한 것이 아니고 행복된 것이라는 것, 행복 속에 있기 때문에 그 행복을 느끼지 못했다는 것을 알기 시작한 것이었다. 편지를 받은 날 부부는 그 어느 날 보다도 자별스럽게 머리를 못고 오래도록 재깔재깔 지껄이면서 세상에서 자기들이 제일 행복스러운 짝이라는 듯 화평한 가정 풍경을 이루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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