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석 부부는 남의 불행 앞에서 넘쳐 나오는 행복감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죽석 부부는 남의 불행 앞에서 넘쳐 나오는 행복감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 글=이효석 그림=이두호 화백
  • 승인 2018.07.20 11:38
  • 호수 6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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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석 장편소설 화분 [94]

죽석들이 그때까지도 도회에 돌아가지 않고 별장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만태가 가게 일의 일절을 맡기고 왔던 까닭에 언제까지든지 넉넉하게 늑장을 부릴 수 있었던 터에 피차의 건강을 위해서 산기운을 흠뻑 맞아가지고 가자는 것과 피서지의 진미는 늦여름과 첫가을 사이에 있는 것이므로 이왕이면 시골맛을 싫도록 보고 가자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피서객들이 거반 다 흩어져 가버린 뒤의 쓸쓸하고 고요한 산속에서 부부는 조금도 적막을 느끼기는새로에 도리어 한가하고 시원하다고 생각하면서 큰 별장을 지니고도 처음 예측과는 달라 세란들의 한패가 가버린 후도 결코 휑휑하다는 느낌 없이 피서의 진미를 완전히 음미하고 있었다. 산속의 시절은 봄이 늦은데 비겨 가을 철수는 한결 속히 재촉되어서 야지보다는 빠르다. 뜰의 잡초가 건들하고 훌쭉해 갈 때에는 나뭇잎도 재빠르게 한잎 두잎 물들어간다. 공기가 차지고 개울물 소리가 맑아 가면 산길에는 산사람들이 따가지고 가다가 떨어트린 잃은 머루송이가 군데군데 구르게 되고 누런 다래 잎새도 그 속에 섞이게 된다. 화단을 비추는 대낮의 햇빛은 짜링짜링 따가우면서도 아침 저녁으로는 몸이 가다들면서 첫서리 올 날이 오늘일까 내일일까 기다려지며 그 첫서리로 시절을 헤아리려는 듯 즐거운 조바심이 생긴다. 그날 죽석들 부부가 그렇게 일찍이 눈들을 뜬 것은 아마도 간밤의 침대 속이 전에 없이 추웠던 모양, 새벽에 이들을 덜덜 갈면서 일어나 객실로 나왔을 때 아니나 다를까 창밖으로 먼 산의 첫서리가 희끄무레하게 눈에 띠었다. 곧게 뻗친 마을길도 침침한 속에서 눈에 뜨이도록 하아얗게 분가루를 썼고 뜰 앞 나뭇잎도 축 늘어져 보인다. 서리가 왔다는 느낌이 새삼스럽게 몸에 찬물을 끼얹자 부부는 금시 소름이 돋고 한층 추워지면서 그것만으로 하나의 일거리가 생긴 듯 되려 감동하고 기뻐하면서 수선을 떨고 옆방에서 아직도 잠들어 있는 식모를 들볶아 깨웠다. 세란들이 떠나자 온천에서 한 사람의 여인을 구해 두었던 것이 넓은 별장에서는 식모인 것만이 아니라 친한 노름동무도 되었다.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는 식모에게 분부해서 짧게 패인 장작을 날라다가 불을 피우게 한 것이다. 객실에는 한편 벽에 벽돌로 단정하게 쌓아 올린 벽로(壁爐)가 있었다. 일상 때에는 헛간 같이 쓰지 않고 묵혀 두고 그 위에 책을 쌓아 놓거나 화병을 올려 놓거나 할 뿐이던 그 화덕이 시절의 필요에 응해서 비로소 귀중한 것으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휑휑한 속에다 장작을 무지고 불을 달아 놓으니 그 해의 첫 불을 피운 셈이다. 마른 나무에 불은 쉽게 붙어 활활 피어오르면서 침침한 새벽 방안을 불그레 비추고 따뜻하게 눅여주었다. 의자들을 끌어다가 화덕 앞에 놓고 부부가 시절의 첫 불을 싸고 앉아 손들을 내밀었을 때 그곳이 집안에서 가장 행복스런 자리가 되고 두 사람에게는 즐거운 생활의 의욕이 흔흔히 솟아올랐다. 따뜻한 불은 그대로가 바로 행복감의 상징이요, 생활감의 달가운 도가니다. 세란의 편지를 받은 것은 바로 그런 때였던 까닭에 죽석들의 행복감은 한층 의식 위에 샘솟아 올랐던 것인지도 모른다. 편지는 아마도 전날 저녁때 배달되었던 것인지 만태가 아침마다의 습관으로 현관문을 열고 밖에 달린 우편통을 열었을 때 세란의 두터운 편지가 손안에 집혔다. 묵직한 무게를 기뻐하면서 벽로 앞에서 아내와 함께 봉투를 뜯었을 때 그 내용이었던 것이다. 부부는 의외의 소식에 놀라고 동정하고 하다가 차차 자기들의 생활과의 대립이 의식에 떠오르자 행복감이 넘쳐 흐르면서 아침 내내 화덕 앞에서 즐거운 생각과 회화가 계속되었다. 돌연히 알게 된 남의 불행을 말하고 반성하고 하는 것이 그대로가 바로 자기들의 행복을 뒤집어 말하는 셈이 되었다. 남의 불행을 이용해서 자기들의 행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불측하다고 해도 하는 수 없는 노릇, 두 사람은 넘쳐 나오는 행복감을 어쩌는 도리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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