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68]끝까지 길 위에서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68]끝까지 길 위에서
  • 박 은 희 한국고전번역원
  • 승인 2018.08.03 11:02
  • 호수 6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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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길 위에서 

이윤(伊尹)은 늘그막에 유신(有莘)에서 농사를 지었고

태공(太公)은 백발로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를 했는데,

지금 내 나이는 두 분보다 아직 젊다.

청산(靑山)과 녹수(綠水)가 죽이야 대어줄 터,

어찌 소인(小人)처럼 땅에 얽매여 떠나지 못하겠는가.

伊尹已老而耕於有莘                (이윤이노이경어유신),

太公白首而釣於渭濱                (태공백수이조어위빈),

今吾之年貌, 比兩公尙少年也     (금오지연모 비양공상소년야).

靑山綠水苟有繼其饘粥             (청산록수구유계기전죽)

更何規規於小人之懷土乎?        (갱하규규어소인지회토호)

- 유몽인(柳夢寅, 1559~1623) 『어우집(於于集)』권4 「증금강산삼장암소사미자중서(贈金剛山三藏菴小沙彌慈仲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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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14년(1622), 어우(於于) 유몽인은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금강산 유람에 나섰다.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있던 32세 때 금강산을 노닌 이후 어언 30여 년 만이었다. 그 사이 어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화(戰火) 속에 분조(分朝)에서 광해군을 모시며 하삼도·함경도·평안도를 위무(慰撫)하는 어사(御史)로 나가기도 했고, 문안사(問安使) 등의 직책을 맡아 세 번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또 임란 때 호종한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기도 했으나, 59세에는 인목 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가담하지 않은 일로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을 받아 퇴거하기도 했다. 

그렇게 5년을 퇴거하던 그가 갑자기 금강산을 유람하겠다고 나서자, 주변에서 모두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노인에게 편안한 것은 이부자리이고 친근한 것은 궤안(几案)과 타구(唾具)이며, 의지할 바는 지팡이고 필요한 것은 술과 고기와 죽과 약물”이라면서, 이런 게 있어도 늙은 몸을 지탱하기 어려운데 어찌 험준한 산을 오르려 하느냐고 반대했다. 만약 불행히도 건강을 해치게 되면 어떻게 치료할 것이며, 죽기라도 하면 어떻게 선영으로 돌아오겠느냐고도 걱정했다. 

하지만 어우는 불에 타 죽으나 얼어 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이고, 굶어 죽으나 먹다가 탈이 나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이며, 요절하거나 장수하거나 죽기는 매일반이라고 웃으며 일축했다. 그리고는 은(殷)나라 건국에 공을 세운 이윤(伊尹)도 늘그막에 유신(有莘)에서 농사짓다 탕왕(湯王)의 초빙을 받았고, 주(周)나라의 기틀을 만든 강태공(姜太公)도 80세(90세라는 설도 있다) 넘어 위수(渭水)에서 낚시하며 문왕(文王)을 기다렸다면서, 자신은 그들보다 훨씬 젊노라 장담했다. 죽을 끓일 먹거리야 자연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면서, 편히 살던 곳을 떠나 객사할까봐 소인처럼 전전긍긍할 필요는 없다고 잘라 말했다.(중략)

현재 우리나라는 노년의 마지막 10년을 대부분 병상에서 보낸다고 한다.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그 마지막 10년 동안, 함께 할 친구도, 가족도, 경제적인 여유도 없는 사람은 더더욱 병상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누구나 이 시간을 죽음을 유예하는 병상이 아닌 ‘인생의 길’ 위에 서 있을 수 있도록, 개인과 사회 모두가 머리를 모아야 하지 않을까.    

박 은 희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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