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백세부인’ 허씨 이야기
조선시대 ‘백세부인’ 허씨 이야기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8.03 11:15
  • 호수 63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려대 대학원에서 조선 중기 ‘누정기’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안세현 강원대 교수가 ‘傳, 불후로 남다’(한국고전번역원)란 책을 최근에 펴냈다. ‘전’은 한 인물의 사적을 기록하는 산문 문체다. 그러니까 인물평전 쯤 된다. 책 내용 중 ‘백세부인’ 허씨 이야기가 흥미로워 소개한다. 
백세부인은 조선시대에 103세까지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천 허손의 딸이며 평산 신영석의 아내이다. 부인에게는 동생 허종과 허침이 있었다. 부인과 동생들의 집은 도성 서북쪽에 위아래로 있었다. 허씨와 신씨는 당시 저명한 가문이어서 사람들이 이곳을 신허동이라고 했다. 지금의 사직동이다.

부인은 성품이 조용하고 덕행이 방정하며 식견이 넓고 사려가 깊었다. 아들 신원은 어릴 때부터 부모의 의로운 가르침을 따라 반듯하게 자랐다. 주변 친구들이 그를 따랐고 안평대군이 더욱 그를 아꼈다. 
안평대군은 동지들과 뜻을 모아 ‘문주회’를 만들었다. 거기에 신원도 초대했다. 신원이 가려고 하자 백세부인이 “평소 사람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더니 지금 왜 그와 함께 놀려고 하느냐. 가지 않는 것이 좋겠구나”라며 아들을 말렸다. 

신원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자 백세부인은 “가더라도 늦지를 말아라. 내가 여기 앉아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마”라고 말했다. 신원이 모임에 가는 도중 갑자기 묵은 병이 재발해 근처의 한 집에서 치료를 받았다. 대청에 빈객들을 가득 모아놓고 신원이 오기를 기다리던 안평대군은 사람을 통해 신원이 병이 난 정황을 전해듣고는 안타까워했다. 
신원이 집으로 돌아오자 백세부인은 “예전에 앓던 병이 발병한 게 오히려 다행이다. 예부터 왕실의 걸출한 자제로서 빈객들을 결집해 명성을 취한 사람 중에 무사히 생을 마친 자가 누가 있더냐. 이 때문에 네가 그 모임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라고 위로했다.

세조는 간간이 안평대군의 모임에 사람을 보내 정탐을 했다. 세조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안평대군이 자기 재능을 믿고 사람들과 널리 교유하는 것에 대해 늘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계유년(1453년 단종1)에서 병자년(1456년 세조2)사이 모임에 참석했던 이들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했다. 신원만이 화를 면했다. 아무도 이런 조짐이 나타나지 않을 때 백세부인만이 미리 알았던 것이다.
백세부인의 특출 난 예지력을 보여주는 일화가 더 있다. 부인의 동생 허종과 허침은 누이를 어머니처럼 모셨다. 출타하거나 귀가할 때면 누이에게 문안을 드렸다. 성종대왕이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내릴 때 허침이 형의 집행을 감독하는 직임을 맡았다. 허침은 어명을 받아 정신이 없던 터라 누이에게 인사를 하지 못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자 부인이 성을 내며 급히 사람을 보내 돌아오도록 했다.

허침은 하는 수 없이 돌아가 누이를 만났다. 백세부인은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침을 마주보고 앉아만 있었다. 어명이 서너 차례에 이르고 서리들이 줄지어 와서 재촉했다. 그런데도 백세부인은 동생을 보내주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리가 와서 “허침 공이 나오지 않아 파직됐으며 다른 사람이 그 임무를 대신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윽고 백세부인이 입을 열더니 “나의 아우가 다행히 죽음을 면하게 되었구나. 그러나 무고한 사람에게 해를 끼치게 됐으니 슬픈 일이도다”라고 탄식했다. 동생이 이유를 묻자 백세부인은 “규방의 사소한 잘못을 가지고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해서는 안된다. 하물며 국모에게 그렇게 해서야 되겠느냐. 어미를 죽여 놓고 신하가 그 아들에게 후환이 없기를 바랄 수 있겠느냐”고 호통을 쳤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허침을 대신했던 자가 제일 먼저 화를 당했다. 모든 것이 백세부인이 말한 그대로였다. 
부인은 건강하게 오래 살았다. 부인의 언행이 집안의 법도가 돼 죽은 뒤에도 온 집안이 그 뜻을 이어 받아 더욱 번창했다. 300여년이 지났는데도 과거에 급제해 조정에서 높은 관직에 오른 자가 수십명에 달했다고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