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칼럼-아름다운 이상향을 찾아서
금요칼럼-아름다운 이상향을 찾아서
  • super
  • 승인 2006.08.27 19: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세상에 이상향은 있을까? 그 곳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우리가 겪는 고뇌, 배고픔, 갈등이 없고 오로지 풍요와 사랑과 넉넉함이 있는 아름다운 사회, 과연 그런 곳이 있을까?


영화 「지평선을 넘어서」(Beyond the Horizons)에 나오는 서방세계 ‘샹그릴라’ 같은 곳일까, 꿀과 기름이 흐르는 ‘가나안’ 언덕일까, 플라톤이 상상한 철인(哲人)이 지배하는 정치모델인 ‘이상국가’일까, 장 자크 루소가 주장한 자연법사상에 입각한 인민과 인민, 인민과 군주간의 자유의지에 입각한 계약구조사회일까.

 

토마스 모어가 공상한 어디에도 없다는 유토피아(Utopia)일까, 조선시대 소설 「허생전」에 나오는 양반의 가렴주구를 벗어나 평등하게 잘사는 ‘서해의 어느 섬’일까, 중국 한나라 유방에게 천하를 얻게 해 주고 자신은 신선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입산했다는 장량(張良)의 장가계(張家界)일까, 전설 속의 섬 제주도 근처의 ‘이어도’일까, 지상의 낙원이라는 ‘타이티’ 섬일까, 불교의 반야심경에 나오는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가세 가세 저 피안의 언덕으로 우리 모두 가세)’의 그 피안의 언덕일까, 유교에서 상정했던 ‘대동사회’ 일까.


현실적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어려우면 그러한 이상향을 꿈꾸는 것일까. 그러면 이상향을 만들겠다는 사람들은 어떠한 제도나 방법을 모색했을까. 다시 말하면 자신의 정치철학에 이상향이라는 그림을 어떻게 그렸을까.


궁예는 ‘미륵세계’를 구현시키려고 했고, 조광조는 ‘도덕국가’를 세우고자 했으며, 정다산은 ‘이상사회’ 속에서 목민관의 덕목을 정립시키려고 노력 했으며, 최제우는 ‘후천개벽적 이상사회’를 부르짖었으며, 조소앙은 민족·국가·개인의 ‘3균주의’를 주장했다.

 

또 칼 마르크스는 생산수단(토지, 자본, 설비)를 공유하면서 분배의 원칙을 가진 사회를 이상사회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사회의 꿈은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느 사회, 어느 시대에도 고통과 갈등과 전쟁이 상존했고 인간 모두가 평안한 사회는 없었다. 현대에 들어와서 이상사회의 체제를 구축한 것은 아마도 ‘복지국가’ 모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사회복지를 잘 시행하고 있는 국가 스칸디나비아가 그 대표적 모델일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도 인간적 어려움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대한민국의 이상향은 무엇이고 우리의 복지국가 방향은 어떠한가. 이승만은 ‘가부장적 권위형’의 모델로 건국과 전쟁 복구에 힘썼고, 박정희는 ‘교도적 기업가형’의 형태로 경제개발의 선두에 섰으며, 전두환은 ‘저돌적 해결사형’이었고 노태우는 ‘소극적 상황적응형’으로 평가해 볼 수 있다.

 

김영삼은 ‘공격적 승부사형’으로, 김대중은 ‘지식적 독단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역대 대통령 모두가 다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백성의 의식주 문제부터 국제사회의 경제 11대 강국으로 키우면서 이상적인 국가로 만들려고 시도했음은 부정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다가오는 새로운 시대에 알맞는 이상향을 설정하고, 우리가 사는 이 대한민국이 그 아름다운 이상향이 되도록 모두 노력해보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