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연인이었던 막간가수, 이애리수
민족의 연인이었던 막간가수, 이애리수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8.08.17 14:40
  • 호수 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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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폐허된 만월대 노래한 ‘황성옛터’

이애리수의 음반 나오자 마자

5만장 팔리는 등 선풍적 인기

배동필과의 목숨 건 순애보

아름다운 결실 맺어 무대 떠나

자신의 몸속에 갈무리된 이른바 ‘끼’라는 것은 아무리 튀어나오지 못하도록 억누르고 제압하려고 해도 뜻대로 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지요. ‘끼’는 아마도 기(氣)에서 유래된 말로 여겨지는데 남달리 두드러진 성향이나 성격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줄곧 무대 위에서 활동하는 배우나 가수들이야말로 이 타고난 끼를 마음껏 발산하고 그 재주를 뽐내어야 비로소 대중적 스타로서의 성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가수 이애리수(李愛利秀, 1910~2009)는 타고난 끼에 자신의 모든 운명이 휘둘려서 생의 한 구간을 살아갔던 인물입니다.

이름도 특이한 이애리수는 1930년 '황성(荒城)의 적(跡)'('황성 옛터'의 원래 이름) 한 곡으로 우리 문화사에서 그 살뜰한 이름을 결코 잊을 수 없는 고운 사람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20세기 초반, 경기도 개성에서 출생한 이애리수는 본명은 음전(音全)입니다. 순회연극사 소속의 배우로 여러 단원들과 함께 관서지방 일대를 돌며 공연을 펼쳤습니다. 그 악극단이 마침내 경기도 개성 공연을 마치던 날, 극단의 중요 멤버인 왕평(王平, 1907~1940)과 전수린(全壽麟, 1907~1984) 두 사람은 멸망한 고려의 옛 도읍지 송도의 만월대(滿月臺)를 산책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휘영청 보름달이 뜬 가을밤이었는데, 더부룩한 잡초더미와 폐허가 된 궁궐의 잔해는 망국의 비애와 떠돌이 악극단원으로서의 서글픔을 자아내기에 충분했습니다. 비감한 심정에 흠뻑 젖은 두 사람은 슬픔을 안고 돌아와 그날 떠오른 악상을 곧바로 오선지에 옮겼고, 가사를 만들었습니다. 

그해 늦가을 서울 단성사에서 공연의 막을 올릴 때 이 노래를 배우 신일선(申一仙, 1907 ~1990)에게 연습시켜 연극공연의 막간(幕間)에 부르도록 했습니다. 이 곡을 듣는 관객들의 볼에는 저절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습니다. 여기저기서 탄식의 깊은 한숨까지 들렸습니다. 관객들의 가슴에는 망국의 서러움과 가슴 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비분강개한 심정이 끓어올랐습니다. 하지만 이후 무대에서는 주로 이애리수가 막간가수로 이 곡을 불렀고, 1932년 봄 마침내 빅타레코드사에서 정식음반을 취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나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구슬픈 버레 소래에 말없이 눈물져요

-‘황성옛터(황성의 적)’ 1절

이 음반은 나오자마자 불과 1개월 사이에 5만장이나 팔려나갔다고 하니 그 인기의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워낙 인기가 높아가자 일본 경찰당국에서는 바짝 긴장의 털을 곤두세웠습니다. 혹시라도 이 노래의 가사 속에 민족주의 사상이나 아나키즘, 혹은 불온한 내용이 없는지 뒤지고 검열했지요. 이러한 때 이애리수는 그녀의 노래를 몹시 사랑하던 한 대학생과 우연히 만난 이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연희전문 졸업반 학생이던 배동필(裵東必)! 하지만 이미 그는 부모가 맺어준 처자가 있었습니다. 만날 기회조차 잃어버린 그들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저승에서라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깊은 밤 몰래 만나 여관방에서 정사(情死)를 시도합니다. 이런 정황이 집주인에게 발견되어 긴급히 경성제국대학병원으로 입원을 하게 되지요. 그토록 완고하던 배동필 부모는 이 위기를 접한 뒤 결국 두 사람의 사랑을 승낙하게 됩니다. 이후 2남7녀의 자녀가 태어났고, 이애리수는 무대를 아주 떠나서 현모양처로만 살아갔습니다. 

그런데 지난 2008년, 뜻밖의 기사 하나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것은 왕년의 가수 이애리수가 경기도 일산의 한 노인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놀라운 사실이 보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무대를 떠나 종적을 감춘 지 어언 80여년! 세월이 흘러서 가수는 백수(白壽) 할머니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20대 시절의 사진과 현재의 얼굴모습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은 오랜 세월이 흘러갔으나 그 선과 윤곽이 같았습니다. 언론에서는 특집을 준비하고 인터뷰 프로그램을 제작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2009년 3월31일 99세를 일기로 한 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지요. 

이애리수 이후로 많은 후배가수들이 이 ‘황성옛터’를 불러서 음반으로 발표했습니다. ‘황성옛터’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1930년대 초반 일본인들까지도 ‘조선의 세레나데’라 부르며 즐겨 불렀다고 합니다. 해마다 가을밤만 되면 처량한 귀뚜라미 소리를 효과음으로 해서 이따금 라디오나 TV를 통해 듣게 되는 귀에 익은 슬프고 애잔한 가락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애리수의 '황성옛터(황성의 적)'입니다. 줄곧 떨어지는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노래 한 곡이 지닌 위력은 그토록 완강하던 식민지의 어둠을 조금씩 깨어 부수는 힘으로 움직였고, 전체 한국인들이 험한 세월을 살아오는 과정에서 크나큰 위로와 용기를 주는 저력으로 작용했던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태어나 고통과 시련의 세월 속에서 엄청난 위로와 격려로 겨레의 가슴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던 노래 ‘황성옛터’는 이제 영원불멸의 민족가요로서 마치 하나의 기념비처럼 우리 앞에 우뚝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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