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GR밸브에 대한 추억
EGR밸브에 대한 추억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8.08.31 13:47
  • 호수 6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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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학원에서 정비기술 배우던 시절 떠올라

평생 언론사 녹만 먹은 기자는 엉뚱하게도 자동차정비기능사 자격증을 갖고 있다. 거기에 버스운전면허, 택시운전면허까지 소지하고 있다. 버스면허는 퇴직 후 귀촌해 시골버스를 운전하려는 요량으로 IMF 직후에 따놓았다. 그 이전 통영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버스를 타고 가면서 후에 이곳으로 내려와 버스를 운전하다 간혹 걸어 다니는 어르신들이 눈에 띄면 공짜로 태워주어야겠다는 작은 꿈을 꾸었다.

택시면허는 또 다른 인생방편이었다. 귀촌이 여의치 않으면 도시에 남을 수밖에 없다. 손쉽게 생활비를 벌 수 있는 직업 중 하나가 택시운전이다. 서울 지리도 익힐 겸 영어회화 마스터하기에 좋은 일자리로 생각됐다. 그러나 이 두 개 자격증은 수십 년째 장롱에서 잠자고 있다. 

자동차정비기능사 자격증을 딴 목적도 시골 생활에 대비한 것이다. 주민들의 농기계나 자동차를 무상 수리해 줘 무언가 마을에 기여도 하고 인심도 얻을까 하는 기대감에서다.

정비기능사 자격증은 제 돈 들이지 않고 쉽게 땄다. 2000년대 중반 잠시 회사를 떠났을 때 국가에서 실시하는 실업자재취업프로그램에 참여했다. 3월 초, 당시 종로5가에 있는 동양자동차학원에 매일 나가 오전 9시~오후 3시, 교육을 받았다. 기름때에 찌든 자동차부품 덩어리들이 드문드문 누워 있는 침침한 교육장에서 오전 이론교육, 오후 실습이 이어졌다. 40여명의 교육생들은 30~50대 남성들로 여성은 한명도 없었다. 

교육생들의 직업은 천차만별이었다. 1톤 트럭 채소상, 증권사 애널리스트, 샐러리맨 등. 자동차 정비업소 현역(?) 직원도 있었다. 그는 “정비기능사 자격증이 있으면 수당을 더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실습용 자동차는 연식이 훨씬 지나 과연 이런 자동차 구조를 익혀 첨단기술이 들어간 신형 자동차를 수리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들 정도였다. 어떤 부품은 수많은 교육생들의 손길에 표면이 반들반들했고 수백 번의 조립과 분해 과정을 거치면서 부품들이 닳아버려 슬쩍 건드리기만 해도 자동분해가 됐다. 

정비기능사 시험은 필기와 실기로 나뉜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이에 한해 실기시험을 볼 수 있다. 필기시험은 자동차면허시험보다 조금 어려운 수준이었지만 단번에 합격했다. 그리고 보름 후 서울의 동쪽 끝에 있는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오전 내내 실기시험을 치렀다. 

5단 수동기어 분해·조립과 에어컨 벨트 탈·장착, 산소센서 값 측정 등의 문제가 주어졌다. 시험장의 수동기어는 학원 것과 달리 신품 수준이었다. 분해는 했지만 조립과정에 애를 먹어 결국 주어진 시간 내 조립을 마치지 못했다. 에어컨 벨트는 차량 밑으로 기어들어가 작업해야 한다. 학원에서는 단번에 척 걸리던 에어컨 벨트가 자꾸 헛돌아 이것도 제한 시간에 마치지 못했다. 두 가지 항목에서 점수를 받지 못하면 불합격될 수도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방법은 시험관에게 읍소하는 길밖에 없었다. “산간오지 주민들의 원동기, 자동차를 수리해주는 봉사를 하려고 한다. 자격증이 꼭 있어야 한다”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죽는 시늉이 유효했는지 모르지만 며칠 후 합격자 명단에 기자의 이름이 들어 있었다. 합격소식을 전해들은 지인은 “앞으로 정비공장에서 싸울 일만 남았네”라며 웃었다. 

실제로 기자는 헤드라이트 전구조차 교환하지 못한다. 벤츠 차량 계기판에 뜬 ‘워셔액 부족’ 그림조차 무슨 표시인지 몰라 그대로 끌고 다닌 적도 있다. 전문 자격증은 입장을 허락하는 ‘상류사회 파티의 초대장’ 같은 구실밖에 하지 못한다. 자동차 고장 수리에는 숙련된 기술과 장비가 더 필요하다.  

독일의 BMW 520 디젤 차량 40여대에 연속적인 화재가 났다. BMW코리아 측은 화재 원인이 ‘EGR(이지알)밸브 작동 이상’이라고 공식발표했다. 배기가스 재활용에 쓰이는 이 부품은 자동차에서 중요한 기능을 한다. 학원 강사도 이 부품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필기시험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곤 했다. 

전 세계 자동차의 핵심 부품이 세계적인 명차에서 고장을 일으키는 이유가 불가사의지만 EGR밸브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춥고 어둡고 낯설었던 자동차학원의 희미한 전등불빛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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