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75] 직임을 벗고 한가하게 지내며…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75] 직임을 벗고 한가하게 지내며…
  • 강 만 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 승인 2018.10.05 11:01
  • 호수 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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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임을 벗고 한가하게 지내며…

[解銓任閑居喜甚口呼]

세월은 대부분 분주한 가운데서 민멸되나니

한가한 때야말로 나의 시간이로다

거친 섬돌의 국화엔 가을 풍경 남아 있고

해묵은 밭의 향긋한 토란엔 한가한 마음 넉넉하네

경서며 사적은 헤어졌던 벗처럼 반갑고

지팡이며 짚신은 둥지로 돌아오는 새처럼 가벼워라

네모난 못에 비 지난 뒤 맑은 물이 흥건하니

속세 시름 한번 씻어 가슴속을 깨끗이 해야지

歲月多從忙裡沈 (세월다종망리침)

閑來方是我光陰 (한래방시아광음)

荒階菊秀餘秋景 (황계국수여추경)

老圃芋香饒野心 (로포우향요야심)

書史欣如經別友 (서사흔여경별우)

筇鞋輕似返巢禽 (공혜경사반소금)

方塘雨過淸漪足 (방당우과청의족)

一洗塵愁凈滿襟 (일세진수정만금)

- 박영원(朴永元, 1791~1854), 『오서집(梧墅集)』 책3 「상견록(常見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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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원이 55세가 되던 1845년, 이조 판서에서 물러난 7월 5일과 예조 판서에 제수된 8월 29일 사이에 지은 시이다. 그는 26세에 문과에 급제한 이후 관각, 시강원, 대각, 육조의 요직을 두루 거치며 중간에 큰 침체기 없이 관료 생활을 해 왔다. 그러다가 신병(身病)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는 소장을 올려 잠시 관직에서 물러나 몸과 마음을 쉴 기회를 얻는다.

말 한 마디 발 한 걸음 사이에도 영욕(榮辱)이 교차하는 조정에서, 그것도 인사를 담당하는 요직 중의 요직인 이조의 장관(長官)을 맡으면서는 그야말로 매일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을 테고 하루하루가 격무의 시간이었을 게다. 이러한 그의 심정은 그가 사직을 청하며 올린 소장에 잘 드러나 있다. 요직을 맡은 수년 이래로 능력에 비해 과중한 직책을 맡은 탓에 두려움과 분주함 속에서 심신이 모두 지쳤으며, 특히 그해 여름의 무더위를 겪는 동안 설사와 식은땀 등의 증상을 얻어 더 이상 공직을 수행하기 어렵다는 내용이다.

분주히 보내는 시간 속에서 자신만의 세월을 잃어가고 있던 그에게 찾아온 자신과 자신 주변을 가만히 관조할 수 있는 여유는 그래서 더욱 소중했을 것이다. 계절의 흐름도 잊고 오로지 공무에만 몰두하다가 그 시공간을 떠나서 만난 섬돌의 국화와 밭의 토란에서 그는 어느덧 찾아온 가을의 한 조각 모습과 누구에게나 곁을 내어주는 대자연의 넉넉한 정취를 발견하게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눈에 들어오는 문자가 보기만 해도 지끈지끈해지는 공문서가 아니라 반갑고, 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곳이 생각만 해도 지긋지긋한 직장이 아니라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정원 한 쪽에 있는 네모난 못은 어떠한가. 서늘한 가을비가 가득 차서 열병처럼 쌓였던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씻어버릴 만하다.(하략)      

강 만 문 한국고전번역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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