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군자의 부끄러움, 소인의 부끄러움
[기고]군자의 부끄러움, 소인의 부끄러움
  • 최영록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전문위원
  • 승인 2018.10.05 11:22
  • 호수 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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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록 한국고전번역원 홍보전문위원]

“부끄러움은 성(性)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람에게 없을 수 없다. 잘 쓰면 군자가 되고 잘못 쓰면 소인이 된다. 부끄러움은 하나이다. 터럭만큼의 차이가 천리로 어긋나게 되니, 부끄러움은 어떻게 쓰는가에 달려 있다.” -윤기(1741∼1826), 무명자집(無名子集) 책8 ‘치(恥)’

맹자(孟子)의 사단(四端)을 보자. ‘의지단(義之端)’인 수오지심(羞惡之心)의 ‘수(羞)’가 바로 부끄러움일진대, 본성에서 비롯돼 사람에게 없을 수 없다는 부끄러움은 과연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창피함’이 아닐까 싶다. 무엇이 창피할까? 하늘을 우러러 고개를 들지 못할 일이면 창피한 일이다. 

시인 윤동주는 창피하지 않기 위해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정의(正義)가 아닌 불의(不義)가 창피하다. 옳은 줄 알면서 실천하지 못함이 창피하다. 

조선조 수백년 동안 내려온 인륜의 미덕이 충효일진대, 국가에 충성하지 못하고 부모에 불효를 하면 창피한 일이다. 부정부패와 청렴결백, 어느 것이 더 창피하고 자랑스러울 것일까? 착함을 행함(爲善)은 하늘의 복을 받으며, 나쁜 짓을 행함(爲不善)은 하늘의 재앙을 받을진저. 진정 부끄러움을 알고, 알면 곧바로 고치는 등 실천에 옮겨야 할 일이거늘. 

하지만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하고, 이름 석 자 내세우기도 어려울 정도로 부끄러운 일인데도 불구하고, 얼굴을 버젓이 들고, 보란 듯이 세상을 활보하는 ‘양상군자(梁上君子)’들이 많아도 너무 많지 않은가. 후안무치(厚顔無恥)는 비단 경제사범뿐만 아니라 정치사범, 사회범죄자 등 ‘길가에 돌멩이’처럼 차고 넘치고 있다.  윤기는 18∼19세기 초반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한 문인으로서 ‘치(恥)’라는 논설에서 군자와 소인의 경계를 ‘부끄러움’ 한 단어로 분명하고 적확하게 구별지었다.  

선(善)을 가까이하지 못하고, 허물을 멀리하지 못하고, 배움은 성인(聖人)에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한 가지 사물이라도 이치를 궁구하지 못하면 저자거리에서 매질을 당하는 것처럼 부끄러워하고, 한 가지라도 미진해 제 몸이 훼손된 것 마냥 부끄러워하며, 아침저녁으로 발분하여 부끄러움을 멀리할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이 군자이다.

그렇다면 소인은 어떤 사람인가? 임기응변이 공교롭지 못한 것이 부끄러우며 부귀를 이루지 못한 것이 부끄럽다고 생각하여, 아침저녁으로 노심초사 부끄러움을 가릴 방법을 생각하는 사람이 소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 삶’을 살면서 부끄러움을 제대로 알고 살 일이다. 이제는 그것만 갖고도 가히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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