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76] 독서하는 자세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76] 독서하는 자세
  • 김형욱 한국고전번역원
  • 승인 2018.10.12 13:57
  • 호수 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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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하는 자세

의지가 중요하고 재주는 다음이다. 

志至焉 才次焉  (지지언 재차언)

- 윤기(尹愭, 1741~1826) 『무명자집(無名子集)』 

제10책 「독서의 순서[讀書次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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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사람들은 ‘위기지학(爲己之學)’이라 하여 자신의 인성함양과 지혜의 터득을 학문의 목적으로 삼았다지만 조선 후기의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가 보다. 양반가에서는 어려서 글자를 익힌 뒤 경서, 역사서, 문학서 각 한두 권씩 배워 문장 짓는 재주만 조금 보이면 모두 과거(科擧)에 전념하였고 이를 통해 문호를 지키고 집안을 이끌어 가는 일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현실을 좋게 보지 않았던 윤기는 위의 글에서 독서하는 순서를 정리했다. 글자를 익힌 다음에는 『사략(史略)』 초권과 『소학(小學)』을, 그 다음은 『사서(四書)』와 『오경(五經)』 및 참고해야 할 경서(經書)와 송유(宋儒)의 저서를, 그 다음은 중국의 주요 역사서와 문장가들의 저술 및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를 섭렵해야 한다는, 단계적인 독서 순서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오직 많이 읽어 자연히 입에 붙어서 오래되어도 잊지 않아야 한다”라는 주자(朱子)의 말도 잊지 않았으니 체계적인 다독(多讀)과 숙독(熟讀)을 원칙으로 삼은 것이다. 

질병이나 사고, 집안일에 매여 독서에 전념하기 어렵다는 누군가의 변명에 윤기는 다음과 같이 답하며 글을 맺는다. 

“고인들 중에 아침에 밭 갈고 밤에 독서한 사람, 경전을 끼고 김을 맨 사람, 땔나무를 지고 다니며 암송한 사람, 질병 속에서 독서한 사람, 옥중에서 글을 배운 사람도 있었으니, 어찌 오래도록 사고(事故)에 얽매여 읽고 싶어도 읽지 못한 사람이 있었단 말인가. 다만 의지가 없는 것이 근심일 뿐이다.

[古人有朝耕夜讀者(고인유조경야독자), 有帶經而鋤者(유대경이서자), 有擔薪行誦者(유담신행송자), 有病中讀書者(유병중독서자), 有獄中受書者(유옥중수서자), 豈有長時拘掣於事故(기유장시구체어사고), 欲讀不能者耶(욕독불능자야). 直患無志耳(직환무지이).]”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도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서늘해진 요즘, 독서하기 알맞은 계절이 되었다. 명색이 고전을 읽고 선현들의 지혜를 알리는 일에 종사한다면서도 단편적인 정보만을 그때그때 주워 담는데 만족하고 있던 나에게 ‘자세부터 바로 갖추라’는 선생의 일침은 따끔하다 못해 아프다. 초학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위에 제시한 순서대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아야겠다      

김형욱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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