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에게 통증이란 무엇인가
인류에게 통증이란 무엇인가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18.10.12 14:19
  • 호수 6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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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걷는 것이 예전 같지 않고

허리‧관절 안 아픈 데가 없어도

노년은 그 통증을 견디며 살아가

통증 뒤에 철학적 깨달음도 있고

가족의 존재도 확인하게 돼

“통증은 내게 언제나 새롭지만 지인들에게는 금세 지겹고 뻔한 일이 된다.” 

알퐁소 도데의 말이다. 맞다. 아프니까 노년이다! 걷는다는 것이 예전 같지 않고, 허리며 관절이며 안 아픈 데가 없다는 얘기는 노년을 맞아본 인류의 한결같은 고백일 것이다! 중년만 넘어가도 예전 같지 않은 몸은 세월이 지날수록 야속해지고 자식보다 의사를 더 자주 만나게 된다. 통증의 어원이 ‘처벌’을 의미하는 라틴어 ‘포에나(poena)’와 ‘갚다’라는 뜻의 그리스어 ‘포이네(poine)’에서 왔다는 걸 생각해보면, 살면서 뭐 그리 대단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몸은 왜 맞은 듯이 아프고 딱히 빚진 것 같지도 않은 데 어찌 이리 고통스러운가! 또 나의 긴 병에 왜 이리 효자는 없는 것인가!

가만있어도 아프고, 걸어도 아프고, 달리면 더 아프고, 달리다가 멈추면 정말 죽을 것처럼 힘이 든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진절머리나는 통증을 안고도 대부분의 인류는 살기를 소망하고 약을 먹던 뭘 하던 그럭저럭 살아간다. 불평할 만큼의 통증이 따로 있겠냐마는, 우리는 평생 통증을 경험하며 살아와서인지 견디면서라도 살아간다. 놀랍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삶은 대부분 죽음을 이긴다. 죽음을 이기는 자 없다. 하지만, 삶의 의지와 힘은 늘 죽음을 압도한다. 사랑해서 살고 싶건, 소원풀이를 하기 위해 살고 싶건, 복수를 위해 살고 싶건 ‘산 자’의 이유는 여러 가지고 죽을 이유는 대부분 정해져 있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 사이에 놓인 통증은 우리에게 무엇일까?

알다시피 통증은 생물학적인 아픔과 통증에 대한 본인 해석의 화학적 조합물이다. 동일한 증상 중에도 누군가는 통증에 대한 역치(반응을 일으키는 최소한의 자극)가 낮고 누군가는 높다. 같은 상황에도 통증을 더 크게 경험하는 이들이 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더 아프거나 덜 아플 수도 있지만, 인간의 고통은 늘 주관적이고 자신의 통증은 늘 100점 만점에 100점이다. 아픈 이에게 아프지 말라해서도 안 되고, 덜 아프다는 이에게 “당신은 사실 더 아픕니다”라고 말하는 경우도 맞지 않다. 대부분 고통을 호소하는 이의 요청에 따라 가기 쉽다. 

극도의 통증 중에는 모든 감각이 통증에 집중된다. 누구의 말도, 누구의 위로도 소용없다. 경험해본 이들은 알 것이다. 그러나 조금 달리 본다면 통증에 집중한다기보다는 삶에 집중하는 과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통증을 경험하고 있는 분들과 인터뷰를 해보면 통증에 대한 놀라운 진술들이 쏟아진다. 통증을 통해 신의 처벌이라는 고대 통증에 대한 해석을 하기도 하고, 진짜 삶을 생각하게 된다는 중세 철학적 해석을 하기도 하며, 진통제만 있으면 된다는 현대의학적 접근을 하기도 한다. 이미 몇 번이나 죽을 뻔한 사람들을 수도 없이 살려낸 현대 의학 차원에서 보자면 질병과 고통을 통해 나타났던 신의 손가락은 지면에서 사라진지 오래일텐데, 우리는 고통 속에서 여전히 신의 지문을 찾고자 하고, 거기에서 의미를 찾고자 한다.

통증으로 역사를 써온 인류에게 통증은 신의 이야기로, 철학적 의미로, 현대적 의학 조치 과정을 보여준다. 그리고 통증으로 태어나 아픔으로 개인의 역사를 써온 노년들 역시 신의 역사로, 인문학적 의미로, 의학적 감탄으로 통증을 말한다. 그러고 보면 노년들은 통증을 통하여 인류의 이야기를 전달한다. 

통증은 개인이 담고 있는 고대의 신화, 중세의 종교, 현대의 의학을 담은 스토리 창구이다. 이 이야기는 고대의 노인들, 중세를 거쳐 현대의 노인들에게도 이어지는 인류의 통증담론이다. 노인들은 통증을 통해 다음세대에게 말하고 있다. 통증을 안고 살아가는 것, 그것은 때로는 신의 해석이며, 철학적 소고이고 의학적 증명이라는 것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다분히 주관적이고 고독한 통증의 순간에는 삶에 집중하고, 눈을 뜨고 나면 그 역사를 듣고 보고 손잡아주는 가족을 확인하는 과정임을 기억한다.

알퐁소 도데의 표현처럼 ‘내게는 언제나 새로운’ 그러나 ‘지인들에게는 금세 지겹고 뻔한’ 그 통증은 인류의 담론을 듣는 장이 되고, 지겹고 뻔해도 그 옆에 힘을 주어 그 손을 잡아주는 가족의 존재를 늘 확인하는 공간이 된다. 어쩌면 미켈란젤로의 그림 ‘천지창조’ 속 그 닿지 않은 손가락 공간에는 간절함과 더불어 신의 손가락을 보는 통증의 담론이 있지 않을까? 보이지 않고 역사에 적히지 않은 가족들의 돌봄의 공간이 신의 검지와 인간의 검지 사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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