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수가 된 평양기생
교수가 된 평양기생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8.10.19 18:53
  • 호수 6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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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11살부터 평양권번에서 일하던

기생 출신 왕수복의 노래는

1935년 당시 최고의 인기 자랑

이때 모든 걸 버리고 일본 유학

성악 공부해 북한서 교수로 활동

일찍이 1930년대 서울에는 평양기생 출신의 왕수복(王壽福, 1917~2003)이란 가수 하나가 장안의 인기를 독차지하고 있었습니다. 통통하고 해맑은 얼굴에 다소 커다란 눈망울을 지녔던 그녀의 대표곡은 '고도(孤島)의 정한(情恨)'과 '인생의 봄' 두 곡이었답니다. 

가수 왕수복은 평남 강동군에서 화전민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 이름은 성실, 그런데 할머니가 수명장수하고 다복을 기원하는 뜻에서 수복으로 고쳤습니다. 모든 성공한 사람의 유년시절이 불우하듯 왕수복의 집안도 몹시 가난하고 불우했습니다. 수복은 11살에 평양 기성권번(箕城券番)으로 들어갔습니다. 이로부터 왕수복은 훌륭한 선생님들로부터 가곡과 가사, 시조 등의 소리지도를 받았고, 거문고를 비롯한 각종 악기를 두루 배웠습니다. 17세 되던 1933년은 서울로 가서 본격적으로 가수활동을 시작하는 벅찬 해였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갈고 닦은 서도소리 가락의 느낌이 살아나는 바탕에 유행가 리듬을 얹어서 엮어가는 왕수복만의 독보적 창법을 완성했던 것입니다.

그해 여름 왕수복은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울지 말아요’와 ‘한탄’ 등 2곡이 수록된 유성기 음반을 취입했습니다. 이 음반은 우리 민족의 전통적 가락을 애타게 그리워하던 식민지백성들에게 벅찬 감동을 안겨주었고, ‘최초의 민요조 가수’, ‘최초의 기생가수’ 등의 칭찬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왕수복의 명성이 본격적으로 전 조선에 울려 퍼지게 된 것은 그해 가을, 포리도루레코드사로 옮긴 뒤 유행소곡이란 이름의 노래 ‘고도(孤島)의 정한(情恨)’(청해 작사, 전기현 작곡, 포리도루 19086), ‘인생의 봄’(주대명 작사, 박용수 작곡, 포리도루 19086) 등 두 곡을 발표한 뒤였습니다. 당시 왕수복의 음반은 한 장에 1원 50전이었다고 합니다. 

1935년, 당시 최고의 인기잡지였던 '삼천리'에서 레코드가수 인기투표를 실시했었는데, 총 여덟 차례나 이어진 이 투표에서 왕수복은 1903표를 얻어 단연 1위를 기록했습니다. 왕수복이 무대에 오르면 대중들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이렇듯 최고의 인기를 짐작하게 해주는 사례가 있습니다. 왕수복은 평양의 권번에서 귀빈 접대하는 일을 하다가 저녁엔 서울의 극장무대 출연스케줄이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통편이 좋지 않던 시절, 평양에서 서울까지 당일에 갈 수 있는 여건은 전혀 마련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왕수복을 위해 일본군 경비행기가 평양에서 서울까지 특별히 이동시켜주었다고 하니 과연 특급 대중연예인이 틀림없습니다. 어딜 가나 왕수복은 항상 화제의 중심인물이었고, 노래 또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만인 절찬’ ‘유행가의 여왕’이란 칭호와 함께 인기를 한 몸에 받던 가수 왕수복의 삶은 마냥 행복하기만 했을까요? 안타깝게도 그렇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가슴 속은 항상 자신을 따라다니는 ‘기생출신’이란 꼬리표가 짙은 그늘로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왕수복은 그동안 마음속에서 몰래 간직해오던 어떤 과감한 결정을 내리게 됩니다. 그것은 첫째로 기생신분의 소속을 평양권번에 반납하는 일이었고, 둘째로는 그토록 하고 싶었던 서양음악을 제대로 수련하기 위해 일본유학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왕수복의 나이 23살, 그때까지도 서울의 레코드회사들은 여전히 왕수복에게 끈질긴 취입제의를 해왔지요. 하지만 그 모든 제의와 권유를 냉정하게 뿌리치고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일본의 대학에서 이탈리아성악을 체계적으로 수련했고, 그것을 우리 민족음악의 전통과 어떻게 결합할 수 있을까 늘 모색하고 고민했습니다. 메조소프라노 성악가로 다시 태어난 왕수복은 유학생활을 마치고 일본 도쿄에서 열린 ‘무용 음악의 밤’ 공연에 출연해서 민요 ‘아리랑’을 서양식 창법으로 불렀습니다. 이것은 우리 겨레의 민요를 성악발성으로 부른 최초의 시도입니다. 

분단 이후 왕수복은 북한음악계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펼칩니다. 김일성대학 경제학부 교수였던 김광진과 결혼해서 부부가 되었고, 그녀도 평양음악대학의 성악과 교수로 부임했습니다. 이로부터 왕수복은 일본유학시절부터 그토록 가슴에 담았던 꿈이요 벅찬 포부였던 조선민요의 현대화와 보급을 위해 마음껏 노력하며 제자양성에 힘을 기울입니다. 북한의 보도에 의하면 왕수복은 팔순을 맞이해서 제자들과 함께 무대공연을 열었다고 합니다. 이 무대에 왕수복은 한복을 곱게 차려 입고 제자들과 나란히 무대와 올라 노래 부르는 모습이 사진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오로지 가요 하나로 우리 민족의 긍지와 자부심을 한껏 살리고 전통적 정서를 꽃피우려 노력했던 가수 왕수복의 아름다웠던 삶은 분단시대 북한에서도 여전히 그 빛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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