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어둠상자’…‘고종 사진’ 수거 나선 황실 사진사 가문
연극 ‘어둠상자’…‘고종 사진’ 수거 나선 황실 사진사 가문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11.16 14:08
  • 호수 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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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의 걸친 사진 추적 속 근현대사의 아픔 녹여내

“황제다운 존재감은 없는데다가 애처롭고 둔감하다.”

1905년 9월 여객선 맨추리어호를 타고 아시아 순방에 나섰던 당시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는 고종의 어진(임금의 사진)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앞선 7월 미국이 필리핀을 점령하는 대가로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하도록 묵인하는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은 주인공인 태프트 장관과 함께 대한제국을 찾은 그녀를 위해 고종은 자신의 사진까지 선물하며 국빈대접을 했지만 결과는 초라했다. 고종은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하고 싶었을까.

오는 12월 2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 무대에 오르는 ‘어둠상자’는 ‘고종은 사진을 없애길 원했다’라는 상상력으로 시작한다. 고종은 어진을 찍은 황실 사진사 김규진에게 사진을 찾아 없애라는 밀명을 내린다. 이 한 마디로 김규진 가문은 4대에 걸쳐 파란만장한 삶을 살게 된다.

등장인물만 15명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이야기지만 작품은 김규진과 그의 후손 김석연·김만우·김기태 등 4대에 걸친 이야기를 4막의 옴니버스식으로 구성해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제1차 세계대전(1914), 진주만 공습(1941), 한국전쟁(1950), 88서울올림픽(1988),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인 사건 속에서 김규진 가문의 고군분투를 담으며 적재적소에 코믹한 요소를 넣어 완급조절을 했다.

‘어둠상자’는 카메라를 뜻한다. 극 초반 집 12채에 버금가는 고가였던 카메라는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개인용 카메라와 손쉽게 찍어 바로 사진을 현상하는 폴라로이드 카메라, 그리고 간편하게 사진을 찍고 버리는 1회용 카메라로 점차 변해간다.

이런 세상의 빠른 변화 속에서 김규진 가문은 고종의 굴욕을 담은 사진을 지워야 한다는 오랜 사명을 이루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지만 현실의 벽에 번번이 부딪힌다.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김석연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노력하지만 미국에 갈 수도 없었고, 일본에 가도 뜻한 바를 이룰 수 없자 결국 자결하고 만다. 

김석연의 아들 김만우는 카투사에 자원해 카메라를 수리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훈장도 받고 작은 수리점을 차린다. 수소문 끝에 미국의 한 갤러리에 사진이 있음을 알게 돼 찾아가지만 보지 못한 채 돌아오고, 결국 ‘가업’을 이으려 대리모까지 동원해 자식을 낳는다. 

3대에 걸친 노력은 결실을 맺어 김규진의 4대손 김기태에게 고종의 어진이 전달된다. 그는 국립현대미술관 직원인 강윤아에게 미국 박물관에 보관된 이 사진의 전시를 제안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강윤아와 사랑에 빠지고 고뇌하게 되면서 고종의 사진 없애기는 오리무중에 빠진다. 

이수인 연출은 “고종의 사진은 오욕으로 점철된 질곡의 현대사를 상징하고, 그 멍에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을 사진을 없애는 이야기에 담았다”면서 “이 작품이 관객들로 하여금 저마다의 방식으로 우리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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