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대한제국의 미술-빛의길을 꿈꾸다’ 전 열려…고종이 홍룡포를 벗고 태황제 예복을 입기까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대한제국의 미술-빛의길을 꿈꾸다’ 전 열려…고종이 홍룡포를 벗고 태황제 예복을 입기까지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11.23 14:13
  • 호수 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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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기자]

회화‧사진‧공예 등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 궁중미술  200여점 선봬

카메라로 찍은 최초 어진 ‘대한황제 초상’, 서양화법 쓴 ‘벌목도’ 등 볼만

이번 전시는 비운의 역사로 기록된 대한제국의 궁중미술 변천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사진은 조선시대 왕의 시무복인 홍룡포를 입은 고종(왼쪽)과 대한제국 선포후 황제의 상징인 황룡포를 입은 고종의 어진.
이번 전시는 비운의 역사로 기록된 대한제국의 궁중미술 변천사를 한 눈에 보여준다. 사진은 조선시대 왕의 시무복인 홍룡포를 입은 고종(왼쪽)과 대한제국 선포후 황제의 상징인 황룡포를 입은 고종의 어진.

지난 9월 종영한 tvN ‘미스터 션샤인’은 의병활동을 중심으로 일제강점기라는 가슴 아픈 우리 역사를 재조명해 호평 받았다. 편당 18억원이 넘는 막대한 제작비를 앞세워 의복 등을 사실적으로 재현했는데 특히 고종의 의상 변화가 인상적이었다. 조선의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제1대 황제인 고종이 홍룡포(왕의 시무복)를 벗고 대한제국 황제의 새 복식, 태황제 예복 등을 입으며 나약해지는 모습을 애절하게 담아냈다. 지난 11월 17일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는 이런 드라마 속 고종의 모습이 재현됐다. 전시장서 만난 고종의 모습과 대한제국의 미술은 드라마보다 더 아프게 다가왔다.

고종에서 순종으로 이어지는 대한제국 미술을 재조명하는 ‘대한제국의 미술 - 빛의 길을 꿈꾸다’ 전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고 있다. 내년 2월 6일까지 진행되는 전시에서는 당시 회화, 사진, 공예 200여점을 통해 대한제국 시대 미술이 어떻게 한국 근대미술의 토대를 마련했는지 보여준다. 

전시는 크게 4개의 주제로 구성된다. 먼저 1부 ‘제국의 미술’에서는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며 발생한 미술의 변화를 살펴본다. 궁중미술은 규범성이 강해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조선 후기의 전통이 이어졌지만 왕에서 황제가 된 고종의 지위에 맞추어 황제와 황후에게만 허용되는 황색의 용포와 의장물이 어진과 기록화에 등장하는 변화를 엿볼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이 20세기 초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고종 어진’이다. 검은 익선관을 쓰고, 황제를 상징하는 노란색 황룡포 차림의 고종은 금박으로 용머리로 장식한 붉은 어좌에 앉아 정면을 똑바로 바라보며 근엄한 모습을 보여준다. 다만 5년 뒤 미래를 예감한 듯한 눈빛은 묘한 슬픔도 불러일으킨다.

미국 하와이 호놀룰루미술관이 소장한 ‘해학반도도’(海鶴蟠桃圖)도 주목할 만하다. 1902년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작품은 비단에 채색과 금박을 입힌 12폭 대형 병풍으로 조선 전통에서는 보기 드문 화려한 채색과 금박을 활용해 상서로운 구름과 천도복숭아 나무 위를 나는 학 10마리를 그렸다. 

‘미스터 션샤인’으로 익숙한 신식무관학교 군인이 등장한 불화도 눈길을 끈다. 1907년 제작돼 공주 신원사에 소장된 ‘신중도’다.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 무리를 그린 불화다. 앞 열 중앙의 호법신이 대한제국 군복과 군모를 착용하고 있다. 대한제국이 새롭게 출현한 신식 군인의 강력한 힘으로 수호받기를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과 재현의 새로운 방법, 사진’에서는 고종을 비롯한 황실 인물들과 관련된 ‘사진’을 소개한다. 대한제국의 주요 인사들은 근대화의 일환으로 사진 수용에 적극적이었다. 1880년대 초 사진가 황철에 의해 최초로 서울 종로(당시 대안동)에 사진관이 설립된 이래 어진이나 기록화 같은 궁중회화의 상당 부분을 사진이 대체한다. 이는 사진이 특유의 표현방식과 특징을 갖춘 새로운 장르로서가 아니라 극사실성을 추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기법으로서 회화를 보완, 혹은 대체하는 차원으로 수용됐음을 알려준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 ‘대한황제 초상’(1905)이다. 미국의 철도‧선박 재벌이었던 에드워드 해리먼(1848-1909)이 1905년 10월 초 대한제국을 방문했다가 고종 황제로부터 하사 받은 사진이다. 고종의 뒤로 갈대와 국화, 붓꽃, 수선화, 새 두 마리가 새겨진 일본 화조 자수병풍이 놓여있어 정치적 혼란기에 전통적 상징체계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3부 ‘공예, 산업과 예술의 길로’에서는 고종‧순종 시기의 각종 공예품의 전반적인 양상과 변화를 조명한다. 당시 고종은 근대화의 일환으로 공예품의 개량을 추진한다. 실제로 당시 공예는 미술과 산업 분야로 나뉘어 서구와 일본의 공예 개념, 제작기법, 표현방식 등을 수용했다. 1908년 대한제국 황실이 전통 공예의 진흥을 위해 설립토록 한 한성미술품제작소의 경우 운영의 난항으로 명칭과 운영 주체가 바뀌는 등 성격이 달라지기도 했지만 처음으로 공예를 미술품 혹은 미술공예품으로 지칭했다. 문양은 조선후기 백자항아리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기법은 근대기 도입된 스탠실을 사용한 ‘백자운룡문호’, 국내 최초 공개되는 김규진이 그림을 그리고, 수를 놓은 12폭 병풍 ‘자수매화병풍’ 등이 대표적이다. 

마지막 ‘예술로서의 회화, 예술가로서의 화가’에서는 기능적 장인에 가까웠던 화원 화가가 예술가적인 성격의 화가로 변모하는 과정을 조명한다. 궁중화가들은 그림을 제작하고 나서도 여타 회화와 달리 관지(款識, 낙관과 유사)를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 도화서(그림을 그리던 관청)가 해체됨과 동시에 다양한 외부의 화가들이 궁중회화의 제작에 참여하게 되면서 ‘외주(外注)’ 화가로서, 전문가적으로 혹은 예술가적으로 대우를 받는 상황이 됐다. 자연스럽게 과거와 같은 익명의 그림이 아닌 자신의 이름을 분명히 남긴 궁중의 회화들이 제작됐다. 

채용신의 ‘벌목도’가 대표적이다. 채용신은 20세기 전반에 전통기법과 서양화법, 근대 사진술을 절충해 얼굴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한 초상화로 유명하다. 벌목을 소재로 한 벌목도는 사람보다 몇 배나 큰 나무들을 베고 있는 광경을 마치 건물 안에서 보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배경의 계곡은 서양식 원근법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나타낸 반면, 전경의 소나무를 베고 있는 모습은 궁중 장식화법인 청록 진채(진하고 강하게 쓰는 채색)로 표현해 시선을 집중시킨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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