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문화예술회관서 전시회 연 울산 남구 세한경로당 회원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렸답니다”
울산문화예술회관서 전시회 연 울산 남구 세한경로당 회원 “붓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그렸답니다”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8.12.14 16:01
  • 호수 6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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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기자]

붓 잡아본 적 없는 여성 어르신들, 그림 시작한지 1년 만에 전시회 열어

윤명희 전 울산시의회 의장의 지도가 큰 힘… “이젠 사물이 달라보여요”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환하게 웃는 세한경로당 회원들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환하게 웃는 세한경로당 회원들

지난 12월 5일 아마추어 화가들의 전시회가 울산 남구 울산문화예술회관에서 개막했다. 단풍 나무, 일출, 산 등 풍경을 투박하게 그린 작품 50여점이 전시실을 채웠다. 화려한 기교도 없고 현대미술처럼 복잡하고 심오한 철학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장을 들어선 사람들은 감탄사를 연발했다. 생전 처음 붓을 잡은 70대 여성 어르신 10명이 1년간 그린 작품들은 색다른 감동을 선사했다.

울산 남구 신정동 세한경로당 여성 어르신들이 사고를 쳤다. 최필남(71) 회장을 필두로 전문작가들도 힘들다는 전시회를 연 것이다. 특히 단발성 이벤트가 아닌 매년 정기전으로 발전시킬 계획이어서 앞으로의 활약을 기대케 하고 있다. 

세한경로당의 무모한 도전은 지난해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화랑을 운영하고 한때 울산시의회 의장을 맡기도 했던 윤명희 전 의장이 초등학교 동창인 최 회장에게 그림을 그려볼 것을 권유하면서 시작됐다. 윤 전 의장은 어렸을 때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서 크레용 등 미술 도구를 일찍 접했고 당시 친구들에게 이를 아낌없이 빌려줬다. 하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대부분의 여성 어르신들은 그림과 가까이 지낼 수 없었다. 노년에 접어들어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이어졌다. 윤 전 의장은 최 회장을 비롯해 동창들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권유했지만 이런 저런 이유로 실제 활동으로 연결되지 않았다

그러다 윤 전 의장의 권유가 마음에 걸렸던 최 회장이 경로당 회원들에게 이를 제안했고 다들 환영하면서 본격적인 그림 그리기가 시작됐다. 최 회장을 비롯, 김수옥, 김영숙, 노영선, 백옥희, 설복자, 성숙자, 안영숙, 오춘자, 최옥혜 어르신이 늦깎이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울산 여성 어르신들의 신화적인 존재였던 윤 전 의장이 강사로 나서는 점도 한몫했다. 

최필남 회장이 그린 작품의 모습.
최필남 회장이 그린 작품의 모습.

최 회장은 “처음에는 붓을 잡는 게 두려워 그냥 색칠만 했다”면서 “3개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자신감이 생겼고 그때부터 풍경을 담을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대부분 그림이 처음이었기에 윤 전 의장은 처음엔 자신을 따라 그리게 했다. 그리고 자신감을 북돋아주기 위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회원들은 서서히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그려 나갔다.

회원들은 화려하지는 않지만 진정성 있게 제주도 돌담길, 설악산 비로봉, 스위스 산악풍경, 장가계, 진주 진양호 일출 등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여행지 추억, 그리고 칸나, 구절초, 맨드라미, 해바라기, 철쭉 등 예쁜 꽃들을 캔버스에 담아냈다. 

나날이 늘어나는 회원들의 실력을 확인한 윤 전 의장은 울산문화예술회관을 대관해 전시회를 준비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 농담인 줄 알았던 회원들은 진심이라는 것을 알고 주저했지만 무언가 홀린 듯 십시일반 돈을 모아 전시실을 빌렸다. 그렇게 전시 일정이 잡히자 회원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진 듯 밤낮없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몰라 경로당에서 저녁밥을 직접 해먹기도 하고, 집에 가서도 새벽 2~3시까지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어느 순간 경로당 곳곳에는 회원들이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차면서 하나의 갤러리로 변신했다. 

성숙자 어르신은 “평소 무심히 바라봤던 사물들이 이제 예사롭게 보이지 않게 됐다”면서 “붓을 들고 하얀 화폭에 그것들을 마음껏 풀어 놓는 게 삶의 낙”이라고 말했다.

그림 그리기는 예나 지금이나 돈이 많이 든다. 물감과 캔버스를 계속 구입해야 하는데 이런 소모품 가격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도 포기하려는 어르신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자 없이 계속 그림을 그리게 된 배경에는 윤 전 의장의 은밀한 지원이 있었다. 회원들이 쓰는 물감 값을 받아서 대신 사다줬는데 이때 자신의 사비를 남몰래 보탰던 것. 설복자 어르신은 “한 번은 회원들이 급해서 직접 물감을 사러 간 적 있는데 평소보다 몇 배 비싸서 놀랐다”면서 “윤 전 의장이 자기돈으로 묵묵히 지원해준 것에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입소문이 나면서 그림을 판매한 어르신들도 있다. 노영선 어르신은 틈틈이 그린 그림 5점을 벌써 팔았다. 노 어르신이 SNS를 통해 완성된 작품을 자랑하자 딸이 감격스러워하면서 작품을 구입해 미국으로 가지고 갔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은 ‘막그림전’이다. ‘마구마구 편한 마음으로 손 가는대로 그린다’, ‘인생 3막을 연다’, ‘인생의 막바지 도전’ 이라는 다양한 뜻을 담아 최 회장이 직접 지었다.

윤 전 의장은 “대부분 70대이지만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어린이들의 순수함에 못지 않다”며 “80대가 될 때까지 매년 전시회를 여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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