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내 나이가 나를 안아 주었습니다
[백세시대 / 금요칼럼] 내 나이가 나를 안아 주었습니다
  • 신은경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 승인 2018.12.21 14:18
  • 호수 6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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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경 차의과학대학교 교수]

얼른 나이 먹고 싶었던 때나

시간이 빨리 간다고 느꼈던 때나

이제 보니 나이가 날 위로해줘

늙어가는 일은 매뉴얼대로 안돼

가장 나다운 것이 나이듦의 지혜

기다림과 기대는 얼마나 가슴 설레는 것인지.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요즘 자주 이렇게 말했다. “제가 지금 책을 하나 쓰고 있어요. 올해가 가기 전에 나올 거예요.” 

그릇에 물이 가득 차면 저절로 넘치게 되어 있다. 기쁨도 슬픔도 마음에 가득 차면 흘러넘치는 것이 자연스런 이치다. 한 해를 보내면서, 그것도 예순을 꼬박 산 마무리 시점에 나이듦을 생각해 보는 글을 모은 것은 내게 아주 큰 의미가 있었다. 그 기쁨과 기대가 가득 차고 흘러 넘쳐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나 보다. 이번에 낸 책에는 삶의 각 시절마다 나를 위로하고 포용해준 시간이라는 선물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을 담담하게 적었다.

나이듦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50대 중반부터였다. 그동안 실버세대를 바라보는 나의 시각도 변해왔고, 비로소 나도 같은 세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노년의 의미> 라는 책을 들고 다니며 읽었고,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세미나에도 참가해 보았다. 이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나이 들어가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할 때는 노년으로 들어섰을 때가 아닌 그보다 훨씬 이전, 바로 40, 50대 라는 점이다. 재정적인 것도 그 때부터 준비해야 하고 건강을 챙기는 일도 이를수록 더 좋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백세시대를 향한 인생계획은 아주 이른 나이에 해야 하는 일이라는 중요한 사실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돈이든 건강이든 인생철학이든 하루아침에 마음먹는다고 달라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나이 들수록 바꾸기가 어려워지는 일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리고 나서 맞게 되는 노년은 여유롭고 찬란한 인생의 황금기의 시작이다. 그래서 이제는 이 세대를 향하여 ‘골든 에이지’라고 이름을 붙여주려 한다.

우리의 삶에는 이른 나이도 늦은 나이도 없다. 얼른 나이 먹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 마음껏 꿈을 펼치기엔 너무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이었다. 그런가 하면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이 아쉽고 안타까운 시절도 있었다. 이제 지나가면 다시는 올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라는 걸 깨닫고 한없이 붙잡고 싶기만 했던 시간이었다. 그러나 이제와 돌아보니 그 어느 때나, 그 때 그 때 그 나이가 나이테처럼 나를 감싸 안아주고 위로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제 나이만큼의 속도로 인생은 달린다고 하는 말에 이제는 고개가 끄덕여진다. 숨 가쁘게 살아야 했던 스무 살에도 나이는 나에게 힘이 되었고, 잘 익은 과일 같은 서른에도 내 나이가 나를 안아주었다. 시속 60km로 달리는 지금 내 삶도 참 푸근하다. 꽤 능숙해진 나의 운전 실력이 60km로 달리는 이 삶을 충분히 감싸 안아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골든 에이지’란 나의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주변에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의 씩씩하고 건강한 모습이었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느낌은 한마디로 ‘아름답다’ 이다. 그래서 지는 해가 아니라 또다시 불타오르는 불꽃으로 사는 골든 에이지에게 용기와 힘을 북돋워주고 싶다. 청년의 시대에 타오르는 불은 가까이 가기에 두렵기도 하고 자칫 너무 가까우면 데일 위험도 있지만, 장년의 불꽃은 멀리서 보면 은은하고 가까이 가면 갈수록 따뜻하고 위로가 되는 불꽃이었으면 좋겠다. 

나이듦에 대한 책을 더 많이 읽고, 노년에 대한 생각을 더 많이 하고, 에이징에 대한 정보를 더 찾아볼수록 하고 싶은 이야기는 더 많아지는 걸 느낀다. 그런 과정에서 하나로 모아지는 생각은 살아가는 일이, 특히 늙어가는 일은 매뉴얼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가장 나답게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은 삶에 대한 태도도 환경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건강도, 재정도, 가족관계도, 일을 하고 그만두는 시기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이전에 책을 쓸 땐 ‘마무리’ 라는 생각이 많았다.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것, 연구했던 것의 최종 마무리라는 생각, 그 동안의 지식과 지혜를 망라하여 총합체를 내놓으려고 전전긍긍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는 느낌이 사뭇 달랐다. 이제 ‘시작’이라는 생각이 많이 든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라 앞으로의 할 일이 더 많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 주변을 보면 늦은 나이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내는 분들을 많이 본다. 은퇴 후 여유로운 시간을 맞아 자신의 긴 이야기를 잔잔하게 풀어내시는 분들도 있고, 새롭게 관심 갖게 된 분야에서 얻게 된 정보를 재미있게 엮으시는 분들도 있다. 사진이야기도 있고, 여행이야기도 있고, 음식이야기도 있다. 어느 이름 있는 작가의 책 못잖게 삶의 지혜가 가득 담겨 있다. 골든 에이지의 아름다운 열매이다.

“목소리가 나오는 한 나는 은퇴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며 70대 후반에도 맹렬한 활동을 하고 있는 성악가 플라시도 도밍고처럼 우리도 은퇴 없이 계속 성장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로 행복하게 나이 들어갔으면 좋겠다. 내 나이가 주는 위안이 나를 감싸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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