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신년특집] 우리나라 역사속 기해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백세시대 / 신년특집] 우리나라 역사속 기해년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
  • 김순근 기자
  • 승인 2018.12.28 13:00
  • 호수 6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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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적었던 기해년…자연재해·종교박해로 상처

2019년 기해년은 복과 재물이 넘치고 길운이 찾아온다는 60년만의 황금돼지해로 화제가 되고 있다. 이로인해 새해에 대한 기대감이 그 어느때 보다 높다. 그러면 과거 역사속 황금돼지해는 어땠을까? 39년 이후 기해년은 1959년까지 모두 33번 있었다. 대체로 큰 전쟁이나 기근이 없는 평온한 해를 보냈지만 크고 작은 재난과 사건도 없진 않았다. 당파싸움과 권력다툼으로 정국이 경색되기도 했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고 했듯 역사속 황금돼지해를 통해 오늘을 슬기롭게 보내고 미래에 대한 올바른 안목을 가져보자.


세종 즉위한 1419년 대마도 정벌… 227척 함선으로 왜구 항복 받아내

1839년 기해박해로 천주교도 대거 희생… 1659년엔 ‘예송논쟁’에 시끌

사라호 태풍 피해
사라호 태풍 피해

◇60년전 태풍 ‘사라’ 강타, 사상 최대 피해 

1959년, 6.25 전쟁의 상흔이 완전히 극복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60년만의 황금돼지해로 들뜬 분위기속에 맞은 민족의 명절 추석연휴에 뜻하지 않은 큰 재난이 발생했다. 1959년 9월 12일 태풍 ‘사라’가 한반도를 강타해 사망 840명, 부상 2533명이라는 사상 최대의 인명피해를 안겼다.

역대 최악의 참사로 불리는 태풍 루사(2002)는 재산피해 규모가 5조원 이상이었지만 인명피해는 246명이었다. 사라는 풍속과 강수량이 역대 태풍중 10위에 불과했지만 당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위력인데다 한가위 명절을 맞아 온가족이 모인 가운데 산사태와 홍수에 휩쓸리면서 큰 피해를 냈다. 

◇격변기 구한말에도 무탈했던 1899년  

19세기 말은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한 상황이다.

강화도 조약(1876년), 임오군란(1882년), 갑신정변(1884년), 동학혁명․일본군의 경복궁 급습 사건(1894년), 단발령(1895), 제주민란(1901년) 등 많은 사건들이 숨가쁘게 일어났다. 이같은 격변기의 구한말 상황에서도 1899년은 별일없이 지나갔다. 

대신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제물포∼노량진) 철도가 개통되고 서울∼인천간 시외전화가 개통되는 등 근대화가 밀려들며 사회, 경제적인 변화가 본격화 되기시작했다.

반면 최초의 민간 신문인 독립신문이 정부에 비판적인 기사로 인해 창간 4년 만에  폐간된 것은 특이사항이다. 공교롭게도 60년뒤 기해년인 1959년에는 경향신문이 이승만 회견기사 등 정부에 비판적인 글로 인해 폐간됐다가 1년뒤에 복간됐다.

◇당파 싸움에 천주교도 대거 희생

기해박해가 있었던 새남터
기해박해가 있었던 새남터

1839년 기해년에는 수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되는 ‘기해박해’로 온나라가 뒤숭숭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온 천주교는 4번의 큰 박해를 겪는다. 이중 하나가 1839년에 일어난 기해박해다. 이때 3명의 서양인 천주교 신부를 비롯해 119명의 천주교인이 처형되거나 투옥됐다. 

기해사옥으로도 불리는 이 사건은 겉으로는 천주교 박해사건이지만 실제로는 당시 세도가문이자 천주교에 관용적이었던 안동 김씨로부터 권력을 탈취하려는 풍양 조씨가 일으킨 것으로 이후 권력은 풍양조씨 가문으로 옮겨졌다. 

◇‘예송논쟁’ 등 왕실내부 문제로 갈등

1659년 기해년은 조선 제17대왕 효종이 승하한 해다. 종기가 난 부위에 침을 맞은 후 많은 피를 흘린 실혈사(失血死)로 인해 41세의 나이로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효종 승하 후 조정은 자의대비(인조의 둘째 왕비)가 상복을 몇 년 입느냐를 두고 극심한 예송논쟁(禮訟論爭)에 휘말렸다. 장남 소현세자의 사망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이 둘째아들인 만큼 1년상을 주장하는 서인과, 왕이 되었음으로 첫째아들로 대우해 3년상을 해야한다는 남인이 대치한 일종의 말싸움이었다. 결국 효종의 뒤를 이은 헌종이 서인 편을 들어 1년상으로 마무리됐다. 

1479년(성종 10년) 기해년은 조선 왕실 내부 갈등이 극심한 해였다. 연산군의 생모인 중전 윤씨가 성종과 세명의 대비, 후궁들과 갈등을 일으켜 집안싸움이 극에 달했다. 급기야 중전 윤씨가 성종의 얼굴에 생채기를 낸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되어 폐서인(廢庶人)이 되어 사가로 쫓겨났다. 이어 사약을 받음으로써 훗날 연산군의 폭정이 시작되는 계기가 됐다.

◇다른 해에 비해 큰 전쟁없는 평화시대 

역사상 황금돼지해에는 큰 전쟁이 없었다. 오히려 전쟁이 끝나고 평화를 맞기도 했다.

1599년 기해년은 왜구가 조선을 유린한 임진왜란이 끝나고 평화를 맞은 원년이어서 서민들이 황금돼지해의 축복으로 여기기에 충분했다.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을 거쳐 7년 동안 전국을 황폐화시켰는데, 공교롭게도 1599년 황금돼지해 직전인 1598년에 끝났다.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8월 18일 사망하자 왜군이 조선에서 철수함에 따른 것이다. 

전쟁도 황금돼지해를 비켜간 것이란 말이 나올만하다.

◇세종 즉위한 해 대마도 정벌

다소 규모가 있는 전쟁이 발생한 황금돼지해를 굳이 꼽자면 1419년과 1359년이다. 1419년(세종 1년) 기해년은 조선조 500년 동안 유일하게 타국을 침범해 전쟁을 일으킨 해다. 왜구의 약탈에 시달리던 조선은 1419년 6월 20일 삼군도체찰사 이종무로 하여금 227척의 함선과 1만7000여명의 수군을 이끌고 대마도를 공격하게 했다. 이종무는 대마도 앞바다에 함선을 정박하고 2주간 전투를 벌였고 대마도 도주에게 항복을 받아내고 귀환했다.

처용무
처용무

◇동해용왕의 아들 처용, 신라인이 되다

‘서라벌 밝은 달밤에 밤 늦도록 노니다가 집에 들어와 자리를 보니 가랑이가 넷이어라…’. 신라 향가인 처용가를 지은 처용이 신라에 나타난 해가 879년 기해년이다.

삼국유사에는 동해의 용이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 앞에 나타나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으며, 그중 한 아들이 왕을 따라가 정사를 도왔고 이름은 처용(處容)이라 했다. 처용은 결혼을 하고 급간(級干) 관직도 받았다. 표현상 많은 과장이 되어있지만 처용은 배를 타고 신라로 온 외국인으로 추정된다.    

김순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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