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친구야, 아프지 마라
[백세시대 / 금요칼럼] 친구야, 아프지 마라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9.01.04 11:23
  • 호수 6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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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건강검진 받던 남편

간경변 같다는 말 들어

그말 전해 듣고 내 속이 타들어가

혼자 남겨질까 온갖 걱정하다

‘가벼운 혹’이라는 결과에 안도

“간경변이래. 자세한 결과는 일주일 후에나 전화로 알려준단다.”

매년 이맘때만 되면 우리 부부는 건강검진을 한다. 위내시경을 시작으로 대장검사, 혈액검사, 복부 CT, 부인과 그리고 심혈관질환까지. 검사한답시고 전날부터 굶은 몸을, 서너 시간 동안이나 사진 찍고, 피 뽑고, 주무르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이리저리 휘둘리다 보면 나중엔 말할 힘도 없다. 거기다가 위내시경을 위해 맞은 수면 주사 후유증으로 정신까지 몽롱하다. 그 몽롱해진 얼굴로 남편이 내뱉은 첫마디가 간경변이다.

복부초음파 검사를 하던 의사가 해준 말인가 보다. 큰일 났다. 검진 결과는 일주일 후에 나오기 때문에 나도 멀쩡한지는 잘 모르지만 일단 남편이 걱정이다. 간경변이라 함은 간경화의 전 단계고 그게 나중에 간암까지 된다는 그 무서운 병이 아닌가. 원인이 잦은 음주나 C형 간염이라 하던데.

이 노릇을 어쩌나. 알코올 분해 능력이 없는 남편은 술도 못 마시는데 그렇다면 C형 간염?

내가 집에서 뭘 잘못해 줬나? 아차. 몇 달 전에 유통기간이 한 달이나 지난 치즈가 아까워서 그냥 남편 먹인 거? 주는 대로 먹는 사람이니 병에 걸렸다면 준 사람 책임? 아니면 혈당 검사할 때 쓰는 채혈침? 매번 갈아 끼우기 번거롭고 아까워서 알코올로 쓱쓱 닦아 썼는데 그게 문제였나. 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내내 속이 답답했다.

“신경 쓰지 마. 초음파 했던 애송이 의사가 뭘 알겠어. 다음 주에 담당 의사 얘기나 들어보자. 아마 지방간을 잘못 얘기했을지도 몰라.”

겉으로는 이렇게 말했지만 속은 타들어 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부엌 깊숙이 처박아 놓았던 녹즙기를 꺼냈다. 녹즙기를 꺼내니 녹즙용 채소가 없다. 부지런히 마켓으로 달려가 간에 좋다는 채소라는 채소는 눈에 보이는 대로 사서 즙을 짜 남편에게 먹였다.

다음 날 아침. 당뇨용 채혈침도 새것으로 갈아 끼우고 인터넷으로 넉넉하게 주문도 했다. TV를 틀었다. 섬진강 다슬기가 간에 엄청 좋단다. 방송 중에 사야 서비스로 한 상자를 더 준다며 물량이 달려서 방송 시간을 다 채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으니 빨리 버튼을 눌러 주문하란다. 버튼만 누르면 남편을 살릴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에 덜컥 눌러버렸다. 물건 사고 결제하는데 총 걸린 시간은 2분. 반품할 때는 골치 꽤 아프던데 살 때는 일사천리다.

그나저나. 만약 남편에게 뭔 일이 생긴다면 남편 없이 나 혼자서 살 수 있을까. 한적한 이 시골집에 혼자 사는 게 안전하기는 한가. 개도 두 마리나 있고 말하는 앵무새도 있고 고양이도 있지만 외롭지는 않을까. 돈 번다고 이제껏 애만 쓰다가 이제부터 슬슬 여행이나 다니며 놀겠다고 했는데 덜컥 가버리면, 그 사람 불쌍해서 어쩌나. 완전한 내 편은 남편뿐이라는데 이제 내 편은 이 세상에서 영영 사라지는 건가. 

그럼 그 좋아하는 영화는 누구랑 보나. 맛있는 음식은? 토닥토닥 싸움은? 등에 파스는 또 누가 붙여주지? 악몽 같던 하루하루가 지나고 드디어 검진 결과 전화상담 하는 날. 전화 순서는 내가 먼저다. 여기도 나쁘고 저기도 나쁘고. 하지만 일 년 후 검사할 때 잘 지켜보잔다.

오케이. 나는 일 년은 벌었다. 그때 걱정하고 그때 지켜보자. 남편 순서다. 얼굴이 백지장이다. 생전 그리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가 전화기를 가지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궁금해서 문에 귀를 대고 숨을 죽였다. 웬걸. 집을 너무나 잘 지었나 보다. 방음이 잘되는지 하나도 안 들린다. 문에 귀를 대고 조용히 기도했다. 

‘저 혼자 살기 싫어요. 남편 살려주세요.’

10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은 10분이 지나자 그가 문을 열고 나왔다. 눈치를 살폈다. 표정이 밝다. 어머나… ‘간경변’이 아니라 ‘간병변’이란다. 간에 기름 덩어리 혹이 있단다. 에이. 나도 그런 혹은 있다, 뭐. 어쨌거나. 이제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살지 않아도 된다. 

‘아이고, 하나님 감사합니다.’

밤이나 낮이나 늘 옆에 붙어 있는 친구. 내 몸의 안팎을 이 세상에서 제일 잘 아는 친구. 눈으로 대화가 되는 친구. ‘저기’ 하면 그게 뭔 뜻인지 ‘여기’ 하면 뭘 말하는지 척척 알아채는 친구. 그 귀하디귀한 친구가 아프다니 상처에 레몬을 뿌린 것처럼 가슴이 시리더라. 친구야. 아프지 마라. 나 혼자 남으면 도저히 외로워서 못살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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