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내 마음에 심은 수선화
[백세시대 / 금요칼럼] 내 마음에 심은 수선화
  • 오경아 작가, 가든디자이너
  • 승인 2019.01.18 13:26
  • 호수 6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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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작가, 가든디자이너]

지난가을 심은 수선화 알뿌리가

노란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며

마음에 묻은 내 꿈과 희망도 

언젠가 싹을 틔울 것이란

기대를 다시 가져본다

아직 베어내지 않은 갈대는 방치한 벼 이삭처럼 누렇게 산발이다. 가든 디자이너라더니 정원관리의 기초도 모르는 것 같다는 쓴소리를 들을 만도 하다. 

양잔디는 이미 얼어, 지나는 발걸음에 바스러져 내년을 기약이나 할 수 있으려나 싶다. 꽃으로 화려했던 화단은 온데간데없고 온 힘을 다 빼고 쭈그러진 잎과 줄기가 초라하다. 상록의 잎을 달고 있다고 알고 있는 회양목, 주목, 측백도 실은 겨울의 색은 초록이 아니다. 붉은 기운이 완연한 어찌 보면 죽은 듯한 초록의 색감이다. 상록, 낙엽 할 것 없이 정원에 남겨진 식물은 이미 안쓰럽고, 처참하다. 눈도 내리지 않는 마른 겨울 2019년 1월의 나의 속초집 정원이다. 하지만 나는 이 정원을 걸으며 반전을 꿈꾼다. 

잘라내지 않은 갈대는 내년 2월의 끝자락에 풀어헤친 긴 머리를 싹둑 잘라 단장을 시킬 참이다. 긴 겨울을 이리 두고 보는 건 따뜻한 지푸라기 한 줌 깔아주지 못한 화단이 이렇게라도 의지를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얼어버린 발걸음에 바스러지는 양잔디는 이 겨울을 이겨내고 내년 봄이 되면 땅속으로부터 싹을 틔울 것임을 믿는다. 상록의 잎이라고 평생 같은 잎을 달고 있지는 않다. 봄이 되면 잎을 바꾸어 오래된 잎을 떨구고 새잎을 틔워낸다. 대신 한꺼번이 아니고 조금씩 바꾸어 우리가 눈치를 채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지금은 우중충한 상록의 잎들도 봄이 되면 밝고 명랑한 새잎으로 바뀐다. 자른 갈대의 밑동에서는 이미 새잎이 돋아날 테고, 내 책상 앞 산딸나무 가지의 도톰한 잎눈, 꽃눈도 날이 풀리면 하루가 다르게 부풀어 오를 게 틀림없다. 구불거리는 가지의 히어리는 노란 펜던트 모양의 꽃을 잎보다 먼저 뽑고, 뒷마당 양지바른 곳 감나무 밑의 수선화, 크로커스, 팥꽃나무는 2월의 끝자락에 가장 먼저 자갈을 비집고 솟아오를 것이다. 

이 일을 하며 지금껏 식물들을 잊은 적이 없다. 언젠가 수명이 다하여 다시 싹을 보여주지 않을 날이 곧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들이 최선을 다해 살아 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믿음 속에 내 마음에도 찌르르한 설렘이 생긴다.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있지만, 우리에게도 지금의 겨울 정원 같은 시절도 많았다. 긴 유학 생활에 집까지 다 팔아버린 후 영국에서 돌아온 첫해, 우리 부부는 살 곳이 없어 창고를 빌려 그곳 2층에 텐트를 치고 살았다. 영하 18도까지 내려가는 추위 속에 전기장판만으로는 견딜 수 없는 나날이었다. 누군가 텐트를 치면 따뜻할 거라는 조언에 눈물겨운 텐트 살이를 시작했다. 그 와중에 남편은 발목과 무릎연골 수술을 받아 몇 달 동안 목발을 짚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이 액면 그대로 눈물겨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텐트 안에 불을 켜고 책을 읽으며 남편과 캠핑이 따로 없다고 시시덕거렸고, 수도 없이 얼어대는 수도를 해결하다 보니 이러다 동파 전문가 되는 거 아니냐며 나중에는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의 어려움이 기가 찼던 앞집 아저씨는 날이 추워지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 저녁 함께 먹자는 핑계로 그 집 2층의 빈방을 내주셨고 남편은 아내에게 못 얻어먹은 집밥 정찬을 그 집에서 해결하곤 했다. 

그렇게 끝도 없이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 같던 겨울이 오락가락 갈듯 말 듯 할 무렵, 주차장 끝 은행나무 밑에서 노란 수선화 꽃이 피어났다. 웬 꽃인가 했는데 그제야 지난가을에 심었던 알뿌리가 생각났다. 지독한 겨울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내가 심은 수선화는 열심히 제 할 일을 한 셈이었다. 

그때 나는 묘한 생각을 했었다. 혹시 내 꿈과 희망도 수선화 알뿌리처럼 마음에 묻어두면 스스로 언젠가 싹을 틔우지 않으려나? 그런데 만약 누가 들어도 이 말도 안 되는 터무니없는 생각이 정말 실현이 된다면 어떨까? 

남향 볕이 온종일 따뜻하게 들어오는 한옥에 살고 있는 우리, 그 안에 예쁜 정원을 만들고, 따뜻한 정원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과 나누며 살고 있는 우리. 이게 실은 언젠가 내가 내 맘속에 묻어두었던 꿈이었음을 문득 깨닫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이 참담한 겨울의 한복판에서 나는 다시 한번 선한 의지를 마음에 심어보려고 한다. 언젠가 깨어날 내 꿈을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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