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왕의 여자 시중드는 환관 수만 2만명?
[110] 왕의 여자 시중드는 환관 수만 2만명?
  • 글‧그림=김성환
  • 승인 2019.02.01 11:29
  • 호수 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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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바우의 유식한 잡학 왜?

‘환관(宦官)’이라고 하면 대체로 중국의 궁중을 연상하지만 사실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 때부터 존재했다. 영어로는 유녁(Eunuch), 고대 인도에선 호자(Hoza)라 불렀으며 어느 나라에서든 왕의 후궁과 처첩이 많을수록 그녀들의 시중을 들기 위해 환관의 숫자도 늘어났다.
인도의 어느 소국의 궁중에는 환관이 2만명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에 대한 호칭은 중궁(中宮), 내시(內侍), 근시(近侍), 형인(刑人) 등 다양한데 우리나라에서는 흔히 내시로 불렀다. 이들은 군주의 처첩들에 흑심을 품지 않도록 인위적으로 성욕과 생식능력이 상실된  자들로 처첩들의 시중을 드는 것이 주 임무였다. 고대 아랍에선 하렘(후궁) 제도와 동시에 환관제도가 생겨났다. 1621년 만주족의 태조 누르하치는 “제후들의 집에서 쓰는 노복들은 어렸을 때 거세해서 쓰도록 하라. 아니면 자라서 왕궁의 부녀자와 정사를 갖게 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처형되거나 죽은 후에 점검해 보면 멀쩡한 가짜 환관이 끼어 있었다고 한다. 즉 그때에도 뇌물이 통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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