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마음의 키높이
[백세시대 / 금요칼럼] 마음의 키높이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학교 기독교상담복지학과
  • 승인 2019.02.01 11:33
  • 호수 6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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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숭실사이버대학교 기독교상담복지학과]

나이 들면서 속이 좁아졌는지

‘쫌생이’란 소리 듣게 돼

왜 이럴까 생각해보니

나이에 적응하는 과정일 뿐

신중하고 알뜰해지는 건 당연

나이가 들면 키가 줄어든다. 많게는 4㎝ 이상 줄었다 말씀하시는 이들도 있다. 수액으로 차있던 목뼈 디스크가 마르고 눌리면서 줄어든다는 게 의학적 설명이다. 그렇지 않아도 짜리몽땅인데 세월이 아쉽기만 하다. 하이힐을 신었던 여성들도 관절이 도와주지를 않으니 천상 하늘이 주신 키를 그대로 보여주어야 하고, 남자들도 땅과 한뼘 더 가까워진다. 그래서 어려서 키가 작은 사람들 별명 중에는 ‘앉으나 서나’가 많았지만, 나이 들면 다 같은 처지다.

  그래서 최근 키높이 신발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줄어든 키를 만회하면서도 구두처럼 안정성이 떨어지지도 않으니 요즘은 남녀노소 키높이 신발을 애용한다. 운동화 전문 매장에 가도 요즘은 최소 3㎝는 커보이게 하는 신발들이 즐비하다. 10대 애들도 30대도, 50대도 그리고 70대가 넘어도 모두 같은 매장에서 높이에 감탄하며 신발을 구매한다. 그리고 신발을 신는 순간 회춘한다. 웃음이 저절로 나온다. 우하하하! 새 신발 사서 좋아. 키 커지니 좋아. 동요처럼 새 신을 신고 팔짝 뛰어보고 싶다!

줄어든 키만큼 마음도 줄어드는 것 같다. 속이 좁아졌다며 부부가 서로를 ‘좁쌀’이라고 부른다지만, 속이 좁아졌다기 보다는 움츠러든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아코디언처럼 자글거리는 주름도 얼굴의 움츠림일 것이고, 줄어든 키는 뼈의 움츠림일 것이며, 앞으로 오목 접혀진 어깨는 심정의 움츠림일 것이다. 왜 이리 밀리는 게 많은지, 어쩜 이렇게 안되는 게 많아지는지! 몸이 움츠러드니 마음도 움츠러지는 듯하다. 뭘 하려 해도 자신감이 떨어지고, 뭘 먹으려 해도 치아나 소화력도 예전 같지를 않다. 어딜 다니려 해도 조금만 걸어도 숨이 차고 잠시만 다녀도 다리가 아프다. 그리고 누가 뭐라 하지 않는 데도 괜히 조심스럽고, 애들이 한마디 하면 꼬박 일주일은 불면의 밤이다. 모임에 나가서도 나는 절대적 삐질이가 되어 자주 맘이 상하고 때로는 버럭 화를 내기도 한다. 딱히 아픈 것도 아닌데 돈을 낼 때는 손이 벌벌 떨린다. 돌아보면 왜 이리 잘못한 것과 부끄러운 것들 투성이인지 고개를 돌리기도 겁이 난다. 신체의 키만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키도 줄어드나? 마음에도 목뼈처럼 무슨 디스크라도 있는 걸까?

나이가 들면 누구 말처럼 ‘속아지가 나빠서’ 쫀쫀해지나? 나름 대단하지는 않아도 대범한 순간도 꽤 있었고, 위대하지는 못해도 관대한 순간도 많았단 말이다. 설사 ‘빈정’이 상한다 해도 굳이 내색하지 않는 센스와 여유도 있었던 지난날이었는데, 왜 사람들은 나더러 ‘사람이 변했다’ ‘속이 좁아졌다’ ‘쫌생이’라고 말할까? 관대함의 수액이 말랐나? 대범함의 디스크가 닳았나?

맞다! 사람이 변한 것도 맞고, 속이 좁아진 것도 맞고 쫌생이인 것도 맞다. 그러나 단어가 틀렸다! 변한 것이 아니라 성숙한 것이고, 속이 좁아진 것이 아니라 신중해진 것이며, 쫌생이가 아니라 알뜰한 것이다. 몸이 달라지니 시간과 결정의 가성비를 높여야 했고, 어른의 몫을 하자니 좀 더 생각하고 조심스레 말하려니 가끔 결정의 타이밍을 놓치고, 남은 자산에 대한 책임을 생각하니 소비에 신중할 수 밖에 없다. 같이 늙어가도 집집마다 사람마다 사정이 다르니 나의 사정을 누가 알까? 변했다느니, 좁다느니, 쫌생이라느니 말하는데, 누군가는 적응중이라고 말했으면 한다. 누군가는 이 ‘나이듦’의 사정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적응과 사정을 아는 이라면 성숙을 말하고, 신중을 말하고 알뜰을 말할 것이다. 

이게 나이듦의 가성비이다. 가성비는 변화와 신중과 쫀쫀함으로 우리 심리 디스크를 더 밀도 있게 만들고 노화의 상황에 맞는 신체변화처럼 지금에 맞는 마음변화를 가져온다. 변해야 잘 늙는 것이다. 신중해야 건강하게 나이드는 것이다. 쫀쫀해야 안전하게 사는 것이다. 도와줄 것 아니면 나무라지도 마라. 나의 늙음에는 나의 키가 맞고 나의 기쁨과 안전에는 나의 심리 디스크가 맞다. 잘 적응하면서 전에 없이 신중하면서 깐깐하고 쫀쫀하게 사는 것, 그것도 나름 재미있다. 늬들이 그 재미를 아느냐? 햄버거 광고문구처럼 ‘늬들이 게맛을 알어?’ 생애 적응의 맛, 생애 가성비의 맛, 생애 계획의 맛, 그 인생의 맛을 늬들이 알겠냐? 쫀쫀해도 내 삶이 좋다. 신중해서 더 좋다. 변해서 새롭게 살아보니 그것 역시 좋다. 이것이 나의 마음의 키높이 신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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