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당구 小考
[백세시대 / 세상읽기] 당구 小考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02.15 13:35
  • 호수 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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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성비 좋고 건강에 유익… 노년층에 인기

자영업자들은 모르고 샐러리맨들만이 아는 단어가 하나 있다. 시말서이다. 업무과실 등에 대한 사유를 적은 문서이다. 회사에 대해 유무형의 손해를 입혔거나 근무 분위기에 저촉되는 행동을 한 경우 상사가 요구하는 일종의 반성문이자 각서이다. 기자 역시 초년병일 때는 시말서가 무엇인지 몰랐다. 모범적으로 회사생활을 한 이는 퇴직 때까지 쓸 일이 없다. 

시말서를 쓴 직장인 가운데 기억 되는 이가 있다. 식품회사에 다니던 지인은 부장 시절 당구 때문에 시말서를 썼다. 뒤늦게 당구의 재미에 빠진 지인은 출근 직후 당구장으로 직행하는 일이 잦았다. 문제는 혼자만 사라진 게 아니라 직원들을 인솔(?)해간 데 있었다. 한창 일 할 오전 시간에 남자들이 통째로 자리를 비우자 사장이 이유를 물었고 당구장을 출입한 사실을 자백한 지인에게 시말서를 요구한 것이다. “당구로 시말서를 쓴 건 아마 내가 최초일 것이며 이는 직장인 잔혹사로 남을 것”이라며 웃던 지인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다.

당구가 도대체 얼마나 재미 있길래 쉰이 다된 직장인이 시말서를 쓸 정도로 빠질까. 한국인이라면 죽을 때까지 끊지 못하는 게 골프라는데 그보다 당구가 더 재밌다는 사람도 있으니 그럴 만한 매력이 있는가 보다. 

요즘 당구장 열기가 뜨겁다. 당구장에 베이비부머 세대가 몰리고 있다. 전직 대학교수, 가죽장갑 제조회사 상무 출신, 예비역 대령 등 직업, 나이 구분이 없다. 사설 당구장뿐만이 아니다. 복지관의 여러 교실 가운데에도 유독 당구대만 북적인다. 당구장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여성이 할머니가 되자 자기 키 만한 큐대를 들고 당구대 주변을 어슬렁거리기도 한다. 

당구장 수도 확 늘었다. 한때 당구는 사양업종이었다. 젊은이들이 PC방으로 몰리면서 당구장은 1999년 2만8300여곳에서 2003년 1만5000여곳으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다시 2만2000여개로 늘었고 증가 추세다. 베이비부머들이 퇴직금으로 벌이는 창업업종 중  하나이기도 하다.

가족부양으로 당구장을 떠났던 노년층이 다시 큐대를 잡는 이유는 탁월한 가성비와 편의성 때문으로 풀이된다. 

당구는 2만원으로 남 눈치 안보고 2~3시간을 보낼 수 있다. 심지어 고수는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반나절도 놀 수 있는 게 당구다. 골프나 테니스, 배드민턴은 개인장비를 갖추어야 하지만 당구는 그럴 필요가 없다. 언제, 어디서든 맨몸으로 가능하다.

실내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안전하며 건강에도 좋다. 득점 욕심에 무리하게 허리를 비틀다가 다치는 경우도 있지만 흔하지 않다. 당구장에서 뼈가 부러지거나 인대가 늘어났다는 얘기를 들어보지 못했다. 

2014년 덴마크 코펜하겐의 노후건강연구소가 60~70대를 대상으로 당구와 노년의 건강 관계를 조사한 결과 주 4회 이상 당구 게임을 즐기는 사람일수록 건강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중장년층 남성들이 당구를 즐기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유대감을 높임으로써 삶의 질이 향상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당구대는 가로, 세로 1.5m×1.72m이다. 당구대 한 바퀴를 돌면 6~7m를 걷는 셈이다. 1시간 당구를 즐긴다면 적게는 2km 많게는 4km를 걷는 것과 같다. 박윤길 강남세브란스병원 재활의학과 교수는 “당구는 과격한 신체접촉이 없고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저강도 운동으로 만성질환이 있을 수 있는 50대 이후 세대에게 권할 만하다”고 말했다.

당구는 치매예방에도 도움이 될 지 모른다. 공을 칠 때 여러 경우의 수를 떠올려야 해 뇌를 많이 쓴다. 이로 인해 뇌와 관련된 질병을 막을 수 있는 효과도 얻지 않을까 싶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떠들고 웃는 사이에 세로토닌 같은 행복호르몬이 분비돼 노화도 늦출 수 있다. 요즘 기자도 시간 나는 대로 다시 당구장을 찾는다. 점심 시간을 이용하지만 간혹 업무 개시 시간에 늦는 경우도 있다. ‘이러다가 나도 시말서 쓴 지인처럼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건 기우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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