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유랑의 슬픈 사연을 담은 노래 ‘타향살이’
[백세시대 / 금요칼럼] 유랑의 슬픈 사연을 담은 노래 ‘타향살이’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9.02.15 13:41
  • 호수 6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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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서울 올라갈 교통비가 없어

아버지 돈 훔쳐 상경한 고복수는

전국가요콩쿠르서 1등 차지

‘타향살이’는 당시 엄청난 히트

만주 공연 땐 눈물바다가 돼

가수 고복수는 1911년 경남 울산에서 출생했습니다. 부친은 잡화상을 경영하는 영세한 상인이었습니다. 유달리 음악을 좋아했던 고복수는 교회 합창단에 들어가 각종 악기를 익혔고, 뒷동산에 올라가 저물도록 노래를 불렀습니다. 선교사들로부터 드럼과 클라리넷을 배웠습니다. 이 솜씨를 인정받아서 울산실업중학교에 특별장학생으로 입학하게 되었지요. 1930년대 중반 고복수는 경남 울산에서 전국가요콩쿠르 예선에 뽑히긴 했지만, 서울로 갈 여비가 없었습니다. 가수로서 출세를 꿈꾸던 청년 고복수에겐 이것저것 물불을 가릴 틈이 없었지요. 마침내 아버지가 주무시는 틈을 타서 금고의 60원을 몰래 꺼내어 달아났고, 1933년 콜럼비아레코드사가 주최한 서울 본선에서 기어이 1등으로 뽑혔습니다. 이때 고복수의 나이 22세였습니다. 

1934년 오케레코드사로 옮겨간 고복수는 자신의 최고출세작이자 우리 민족의 대표적 노래라 할 수 있는 ‘타향살이’로 엄청난 히트를 했고, 잇따라 ‘사막의 한’이 또 대박을 터뜨렸습니다. ‘타향살이’의 원제목은 ‘타향’이었는데, 이 음반의 또 다른 면에 수록된 노래는 ‘이원애곡(梨園哀曲)’입니다. 떠돌이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슬프게 노래한 내용이었지요. 이 두 곡이 수록된 음반은 발매 1개월 만에 무려 5만장이나 팔렸고 단번에 만인의 애창곡이 되었습니다.

타향살이 몇 해런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련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타향살이’ 전문)

나날이 인기가 쇄도하자 레코드사에서는 제목도 ‘타향살이’로 바꾸고 위치도 B면에서 A면으로 옮겨 다시 찍었습니다. 쓸쓸한 애조를 머금은 소박한 목소리, 기교를 섞지 않는 창법이 고복수 성음의 특징이었습니다. ‘타향살이’는 한국가요의 본격적 황금기를 개막시킨 첫 번째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만주 하얼빈 공연이나 북간도 용정 공연에서는 가수와 청중이 함께 이 노래를 부르다 기어이 통곡으로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공연 전에 이 노래에 대한 자료를 결코 알려준 적이 없었지만 관객들은 이미 다 알고 조용히 따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청중들의 요청에 의해 4절이나 되는 노래를 몇 차례나 반복해서 불렀다고 하니 그날 극장의 뜨거웠던 분위기를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가수와 관객이 완전히 하나가 되어서 눈물로 불렀던 드문 사례로 기록이 됩니다. 

가수 고복수의 삶은 비교적 순탄했던 편이지만 불운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고 북한군에 납치되어 끌려가다가 구사일생으로 탈출했던 일, 악극단 경영과 영화제작, 운수회사의 잇따른 실패는 늙은 가수의 몸과 마음을 극도로 지치게 했습니다. 기어이 저급한 전집물(全集物)을 들고 서울 시내 다방을 떠돌며 “저 왕년에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입니다”라면서 눈물 섞인 목소리로 애걸하면서 서적 외판원 노릇을 하던 슬픈 장면을 되새겨 봅니다. 그는 자신의 은퇴 공연 무대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수생활 26년 만에 얻은 것은 눈물이요, 받은 것은 설움이외다.” 당시 우리의 문화적 토양과 환경은 훌륭했던 민족 가수 하나를 제대로 관리하고 지켜내지 못했던 것입니다. 1957년, 고복수가 가요계를 아주 떠나던 날 서울 시공관에서 열린 고별공연에는 무려 100여명의 동료, 후배 대중연예인들이 작별을 아쉬워하면서 우정 출연으로 무대에 올랐습니다. 가수 이난영은 자신의 대표곡 ‘목포의 눈물’을 울먹이는 목소리로 불러서 관객들의 슬픔과 서러움을 자아내기도 했습니다. 이난영이 곧 울음이 터질 듯한 애처로운 목소리로 아슬아슬 노래를 이어갈 때 마지막 마무리를 후배 가수가 제대로 마칠 수 있도록 고복수 선생이 마이크 앞으로 다가와서 끝까지 보조하는 아름답고 흐뭇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수 고복수는 1972년 서울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87년부터 가수의 고향 울산에서는 고복수가요제를 실시해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데 1991년 제4회 고복수가요제가 열렸을 때 울산시 중구 북정동 동헌 앞에 대표곡 ‘타향살이’가 새겨진 고복수 노래비가 세워진 것은 참 반갑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가수가 태어난 울산시 병영동에는 ‘고복수 마을’, ‘고복수 길’도 지정되었고, 이후 서울 노원구 상계동 당현천에는 고복수, 황금심 부부를 추모하는 부부 가수 노래비도 세워졌습니다. 

한국가요사에서 이젠 민족의 노래이자 불후의 명곡이 된 ‘타향살이’의 애잔한 곡조를 나직이 흥얼거려 봅니다. 1927년까지 만주로 쫓겨 간 이 땅의 농민들은 100만 명이 넘었습니다. 한반도 북부의 험준한 산악지역에서 화전민으로 살아가던 사람들은 120만 명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런 역사적 사연과 아픔을 생각하며 ‘타향살이’를 잔잔히 불러보면 어떨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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