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3.1운동 100주년 되새기는 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 등 30인은 끝까지 싸워
[백세시대 / 3.1운동 100주년 되새기는 만세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손병희 등 30인은 끝까지 싸워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2.21 21:04
  • 호수 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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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기자]

겁을 먹고 거사 장소 파고다공원서 태화관으로 옮겼다는 건 억측

아우내장터 시위 이끈 유관순 열사, 특사 직전 순국… 서훈 등급 높여야

형사소송은 ‘무혐의’ 처분. 민사소송은 ‘일부 발언에 대한 배상’. 지난해 12월 3‧1운동을 주도한 민족대표의 후손들과 스타 역사강사 설민석 씨의 길고긴 법정투쟁은 이렇게 마무리됐다. 설 씨는 2014~2015년에 걸쳐 진행한 역사 강의에서 민족대표 33인에 대해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태화관은 우리나라 최초의 룸살롱이다”, “대낮부터 술을 마셨다”, “마담과 손병희가 사귀어서 태화관에 모였다” 등의 발언을 했다. 또 민족대표 33인의 대다수는 이후 변절했다고도 주장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민사소송에서 민족대표 33인 대다수가 변절했다는 부분만 명예훼손으로 일부 인정했다. 이처럼 현재 3‧1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민족대표 33인의 행적은 폄훼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만세시위운동의 또 다른 상징인 유관순 열사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안중근 의사 못지않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는 유 열사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3·1운동의 상징적 존재임에도 서훈은 건국훈장 5단계 가운데 3등급에 그쳐 꾸준히 저평가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민족대표 33인과 유관순의 업적을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는 1919년 3월 1일로 되돌아가야 한다. 알려졌다시피 손병희를 비롯한 민족대표 29인은 이날 오후 2시 서울 인사동의 요릿집 태화관에 모여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獨立國)임과 조선인(朝鮮人)의 자주민(自主民)임을 선언(宣言)하노라”로 시작되는 역사적인 ‘3·1독립선언서’를 발표한다. 33인 중 김병조는 독립을 알리기 위해 해외로 나가고 길선주‧유여대‧정춘수는 지방에서 올라오는 길이어서 참석하지 못했다.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주인에게 경찰에 알리도록 하고, 얼마 후 밀어닥친 헌병경찰 80여 명에게 붙잡혀 남산의 외경대 경찰총감부로 압송됐다. 

설 씨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비판하는 부분은 낭독 장소를 탑골공원에서 태화관으로 변경한 부분이다. 겁을 먹고 소극적으로 행동한 것 아니냐는 비판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는 잘못 알려진 사실이다. 

최린‧정춘수‧박희도는 변절

민족대표들은 앞서 2월 20일 회의를 열고 ‘독립선언은 3월 1일 오후 2시에 파고다공원에서 거행하자’고 결정했다. 그러나 거사를 하루 앞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 사전모임에서 장소가 태화관으로 변경됐다. 그 이유는 민족대표 권병덕 등에 대한 법원과 경찰의 신문조서에 나타나 있다. 권병덕은 “이갑성이 말하기를, 그 일을 학생이 알고 있어서 다수가 집합할 모양이라고 말하니, 손병희가 학생은 난폭하기 쉬우므로 발표 장소를 변경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해서 명월관 지점(태화관)에서 발표하기로 확정했다”고 진술했다. 손병희 등 민족대표들은 학생들과 경찰이 충돌해 학생들이 희생되는 상황을 우려했던 것이다.

유관순 열사와 민족대표 33인은 삼일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들이지만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다. 사진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 기록화
유관순 열사와 민족대표 33인은 삼일만세운동의 상징적 인물들이지만 상대적으로 저평가 받고 있다. 사진은 민족대표 33인의 독립선언식 기록화

겁을 먹었다는 부분도 상식적으로 맞지 않다. 민족대표 33인은 곧바로 연행돼 대부분 적게는 1년 6개월에서 많게는 3년까지 옥살이를 했다. 당시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잔혹하게 대한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당히 연행됐고 손병희는 고초를 겪은 끝에 옥사를 하게 된다. 최린·정춘수·박희도를 제외한 나머지 30인은 끝까지 독립을 위해 싸웠다. 

민족대표 33인과 달리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는 보다 가슴을 울린다.  

“내 손톱이 빠져 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사오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가 없습니다. 나라에 바칠 목숨이 오직 하나 밖에 없는 것만이 이 소녀의 유일한 슬픔입니다.”

유언에서 알 수 있듯 1920년 9월 28일 눈을 감을 때까지도 유관순 열사는 나라 걱정뿐이었다. 이런 그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태어났다. 유 열사의 집안은 조선 중기 광해군 복위음모 사건에 연루돼 정치적 박해를 입은 고흥 유씨 집안으로, 모두 9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하며 나라를 위해 헌신했다.

유 열사는 어께너머로 혼자 한글을 깨치고 성경구절을 외는 등 어릴 때부터 총명했다. 여성교육에 남달리 열성적이었던 미국 선교사 엘리스 제이 햄몬드 샤프의 눈에 띄어 1915년경 이화학당 2학년에 교비생(장학생)으로 편입하게 된다.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그는 정동교회의 손정도, 이필주 목사 등 민족주의적 기독교 지도자 등에게 영향을 받아 민족의식과 근대여성의식에 눈을 뜬다.

유 열사는 괄괄한 성격에 부지런하고 열성적이었고, 뜨개질과 바느질을 잘 하는 섬세한 면모와 장난꾸러기 같은 짓궂은 면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만세시위운동 당일 유 열사는 이화학당 프라이 교장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담을 넘어 서울 시내의 시위운동에 합류했다. 3월 5일 학생단 시위에도 다시 참여했다가 체포됐는데 학교당국이 경무총감부와 교섭해 석방됐다.

학교가 휴교하자 3월 13일 고향 천안으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도 유관순은 “칙칙폭폭” 하는 기차소리조차 “대한독립, 대한독립”하는 소리로 들렸다고 할 정도로 오로지 나라의 독립을 생각했다. 천안으로 내려온 그는 가족과 가문의 큰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설득했다. 3월 31일 밤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유관순은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다. 

유관순 열사, 감옥에서도 만세운동

유관순 열사
유관순 열사

그리고 4월 1일 각지에서 병천 아우내 장터에 약 3000명의 장꾼이 모여들었다. 오후 1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유 열사는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에 앞장섰다. 병천 일본헌병 주재소의 헌병들이 시위대를 제지했고, 총검으로 선두에 선 유관순의 큰 태극기 깃대를 쳐서 부러뜨리고 다시 옆구리를 찔렀다. 

헌병은 상처를 입은 유 열사 머리채를 잡고 주재소로 질질 끌고 갔다. 이를 본 유 열사의 부모가 끌려가는 딸을 뒤따라가며 필사적으로 만세를 외치자 다시 총검으로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를 찔러 목숨을 앗아갔다. 이때 유관순은 헌병의 손아귀에서 풀려나 피신할 수 있었으나, 얼마 후 다시 붙잡혔다. 

유 열사는 두 번의 재판을 거쳐 3년 형을 받았다. 서대문 감옥에서도 만세운동을 이어갔다.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아 유 열사는 다시 감옥 안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한다. 이때 모진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된다. 아우내 시위 때 입은 상처를 비롯 그간 갖은 고문후유증에다 방광파열이 겹친 유 열사는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얼마 뒤 눈을 감는다. 영친왕과 이방자의 결혼기념 특사로 형기가 1년 반으로 단축돼 석방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그의 유해는 이태원 공동묘지에 쓸쓸히 묻혔으나 일제 군용지 개발로 인해 무덤조차 없어져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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