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주년 되새기는 만세운동] 도시→농촌→해외로 확산… 일부 지역선 무력시위도
[3.1운동 100주년 되새기는 만세운동] 도시→농촌→해외로 확산… 일부 지역선 무력시위도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2.28 20:07
  • 호수 65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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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기자]

3개월간 전국서 1692건 “만세”… 교사‧학생 등 지식인 유인물 뿌려

서울·경기가 427건 최다… 경북선 철도운행 막고, 경찰 주재소 습격

태화관 선언식을 계기로 시작된 3·1운동은 같은 날 평양, 의주, 진남포, 정주, 선천, 원산 등 북부지역에서도 동시에 진행된 것을 비롯, 수개월 동안 지속됐다. 도시 등 교통이 발달한 곳을 중심으로 시작돼 농촌 등지로 전파되며 전국적인 규모로 확산됐다. 국외로도 확산돼 만주, 연해주, 도쿄, 오사카, 필라델피아 등에서도 독립시위가 벌어졌다.

확산 과정은 크게 3단계로 구분된다. 1단계인 점화기에서는 서울을 비롯해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선천, 원산 등의 주요 도시에서 독립선언서가 배포돼 운동이 시작됐다. 3월 2일에는 함흥, 수안, 황주, 중화, 강서, 대동, 해주, 개성 등 천도교와 기독교의 조직력이 강한 평안도, 함경도, 황해도의 주요도시들로 시위가 확산됐다. 3월 3일에는 고종의 장례식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서울로 모였고 이들 가운데 많은 수가 시위운동에 참가했다. 

서울의 학생들은 3월 5일 남대문역 광장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평양과 광주 등의 학생들도 결사대를 조직해 참여했다. 이날의 시위는 3월 중순 이후 각 지방으로 시위운동이 확산되는 데 큰 구심점이 됐다.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고 지방으로 돌아가는 참배객들에게 운동을 지속적으로 전파했기 때문이다. 

3월 10일을 전후로 한 2단계 도시확산기에선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충청도 등 중남부 지방으로 확대돼 전국적 규모로 확산됐다. 이 과정에는 교사와 학생 등 지방 사회 지식인들의 역할이 컸다. 이들은 선언서 등의 각종 유인물과 시위 경험을 각 지역에 전파했다.

3월 중순 이후의 3단계 농촌확산기에는 도시뿐 아니라 농촌에서도 시위가 일상화됐다. 농민 등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시위의 규모도 커졌다. 특히 3월 하순에서 4월 상순까지 전체 시위의 60% 이상이 일어날 정도로 운동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5월까지 전국적으로 1500여회 이상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최근 국사편찬위원회(이하 국편)는 이러한 방대한 정보를 취합한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를 공개했다. 지리정보시스템(GIS)과 연계해 1919년 일어난 3.1운동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에서는 일자별로 시위 발생 지역을 파악하고, 사건 유형·탄압 양상·시간·운동매체·행동 양상·운동 주체 등 종류별로 삼일운동을 살펴볼 수 있다.

국편은 소요사건 관계서류, 일본 외무성 기록, 도 장관 보고, 경성지법 검사국 문서, 3·1운동 관련 판결문, 재한 선교사 자료, 한일관계사료집에서 3·1운동 관련 정보 2만1407건을 추출했다. 국편은 이 정보를 분석해 1919년 3∼5월에 시위 1692건, 철시 25건, 파업 3건, 휴학·휴교 61건, 계획 350건, 기타 활동 333건 등 일제에 저항한 사건 2464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수치는 일제가 발표한 시위 건수 800여 건보다 월등히 많고, 독립운동가 박은식이 1920년 펴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기록한 1542건보다도 약간 더 많다.

지역별 시위 건수는 서울·경기가 427건으로 최다였다. 이어 황해도 177건, 평안북도 148건, 경상남도 140건, 경상북도 118건, 충청남도 117건, 평안남도 112건 순이었다. 국외에서도 시위 99건이 발생했다.

특히 데이터베이스에서는 1600여건의 시위별 상세한 전개과정을 소개해 이해도를 높였다. 이를 통해 지역별로 만세시위가 어떻게 시작됐고 언제 마지막으로 진행됐는지 등을 알 수 있다.

대구·경북 지역을 예로 들면 이렇다. 이 지역 3‧1만세시위는 3월 3일 독립선언서가 경상북도 대구부로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준비됐다. 그로부터 5일 뒤 3월 8일에는 서문시장에서 첫 3.1 만세 시위가 시작됐고 기독교인과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는 구(舊)한국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거리를 행진했고 대구경찰서와 대구헌병분대가 출동해 무력으로 이를 저지했다. 이때 수백 명이 경제 연행되면서 시위대는 해산됐다. 시위에 참여했던 김용해 씨는 체포 후 경찰의 구타로 부상을 입고 석방된 뒤 숨졌다.

대구에서 시작된 시위는 경북으로 전파됐다. 3월 7일 경북 칠곡군 지천면 경부철도 신동역 부근 선로 위에 큰 돌을 올려놓고 기차 운행을 방해하면서 저항했다. 만세운동 위주의 시위는 3월 17일 안동군 예안시장 시위부터는 무력시위로 바뀌었다. 당시 장날을 맞아 시장에 모인 1500여명의 주민들은 만세 시위를 벌였고 이 가운데 20여명이 예안경찰관주재소로 연행되자 시위대가 주재소로 몰려가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헌병들의 발포로 총상을 당한 사람도 다수 발생했다. 

이후 시위는 더 격화됐고 3월 18일 경북 영덕군 성내동시장에서 열린 만세시위에서는 수백명이 영해면사무소와 영해경찰관주재소 등을 습격해 건물을 부수고 서류와 집기 등을 파손했다. 시위대는 일본군 대구 보병연대 등에서 출동한 군인들의 무력 진압으로 해산됐고 시위대 4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2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이틀 후 안동에서는 경찰서에 갇혀있던 사람들이 유치장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대구·경북에서는 5월 7일 청도군 매전면 귀촌동에서 노동자 수십 명이 시위를 벌인 것이 마지막 만세시위로 기록됐다. 

이와 같이 전국적으로 벌어진 삼일운동의 자세한 내용은 ‘삼일운동 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samil/)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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