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 배우 엄정숙·구재숙·손영옥 씨 대학로 뮤지컬 무대서 비전문 시니어 열연에 갈채
시니어 배우 엄정숙·구재숙·손영옥 씨 대학로 뮤지컬 무대서 비전문 시니어 열연에 갈채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3.29 13:44
  • 호수 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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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기자]

춤과 코러스 넣는 ‘앙상블’ 역할… 젊은 배우들과 프로무대서 호흡 척척

김진우 감독에 발탁돼 두달 간 맹연습… “다음 무대에 또 도전하고파”

비전문 배우로 대학로 무대에 선 엄정숙, 손영옥, 구재숙 씨(왼쪽부터 순서대로). SF뮤지컬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에서 대학로 역대 최연장자 앙상블로 활동하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진=조준우 기자
비전문 배우로 대학로 무대에 선 엄정숙, 손영옥, 구재숙 씨(왼쪽부터 순서대로). SF뮤지컬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에서 대학로 역대 최연장자 앙상블로 활동하며 큰 박수갈채를 받았다. 사진=조준우 기자

뮤지컬에는 ‘앙상블’이라는 역할이 있다. 주인공 뒤에서 무대가 허전하지 않게 춤을 추며 코러스를 넣어주는 역할로 보통 두 명 이상이 연기한다. 배우들이 무대경험을 쌓기 위해 주로 맡기에 대부분 20대로 구성돼 있다. 대학로에서는 ‘앙상블=어린 신인 배우’라는 공식이 있을 정도다. 적어도 지난달까지만 해도 이 공식은 하나의 법칙이었다. 3월 15일부터 31일까지 대학로 유니플렉스 2관에서 공연된 ‘나는 왜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나’가 최초로 ‘시니어 앙상블’을 선보이기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국내 공연예술의 메카 대학로 무대에 프로 경력이 전무한 60~70대 시니어 배우들이 도전해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엄정숙(72), 구재숙(66), 손영옥(61) 씨로 젊은 배우들과 함께 무대에 올라 남다른 연기 열정을 과시했다. 황폐화된 100년 후 지구에 세워진 가상의 인공도시 밀양림을 통해 인공지능(AI), 유전공학 등 첨단기술이 바꿔놓을 인간의 삶과 미래상을 그린 작품에서 세 사람은 비중은 적지만 등장 때마다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 사람의 출연에는 연출을 맡은 극단 듀공아 김진우(58) 감독의 과감한 결정이 있었다. 5장의 앨범을 발표하고, ‘애드리브’ 등을 쓴 국내의 대표적 SF소설가이기도 한 김 감독은 다양한 문화장르를 넘나들며 얻은 노하우로 2015년부터 십삼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어둠을 소재로 13편의 연극을 선보이는 프로젝트로 카프카의 ‘변신’, ‘소돔 버라이어티 클럽’, ‘헬레나, 헬레나’ 등 8편의 작품을 선보였다. 3년 동안 한 연출가가 8편의 작품을 선보인 것은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이런 김 감독이 엄정숙, 구재숙, 손영옥 씨와 연을 맺게 된 배경에는 시니어 극단이 있다. 김 감독은 2009년부터 시니어 극단을 지도하며 노인을 대상으로 벌어지는 보이스피싱, 상조보험 사기 등을 예방하는 연극을 선보이고 있다. 연기 경력이 아예 없는 시니어들을 직접 선발해 연기를 가르친 후 매년 20곳의 복지관을 돌면서 범죄 예방 연극을 선보여 호평 받고 있다. 엄정숙, 구재숙, 손영옥 씨는 우연한 계기로 이 극단에 참여하면서 아마추어 배우로서 활동해 왔다.

십삼야 시리즈의 9번째 작품으로 자신이 2001년 발표한 ‘밀양림’(2013년 ‘소셜포비아’란 제목으로 재간행)을 뮤지컬로 각색하기로 결정한 김 감독은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전문배우인 시니어들로 구성된 앙상블을 선보이기로 결정한다. 

무료로 공연을 선보이는 아마추어 무대와 달리 유료 관객을 대상으로 한 대학로 무대는 서툰 연기는커녕 한 치의 실수도 허용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무대 중간 중간 암전(조명을 끄고 무대 장면을 바꾸는 일)이 진행돼 익숙지 않은 시니어배우들에게는 더욱 험난하다. 하지만 김 감독은 자신과 동고동락한 시니어 배우들의 가능성을 믿고 파격적인 결단을 내린다. 

김 감독은 “현재 대학로는 로맨틱 코미디 위주의 연극, 흥행성을 인정받은 ‘웰메이드’ 뮤지컬 중심으로 재편되면서 과거와 달리 실험적인 작품이 설 자리를 잃고 있다”면서 “이런 현실 속에서 SF뮤지컬, 시니어 앙상블 등 색다른 시도를 통해 다양성을 잃은 대학로에 활기를 불어넣고 싶었다”고 말했다.  

많게는 200회 이상 아마추어 무대에 서본 세 사람이지만 프로 무대 준비 과정은 혹독했다. 비중이 큰 역할은 아니지만 2월부터 연기 연습을 시작한 세 사람은 매일 연습실에 나가서 젊은 배우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렸다. 공연 임박 전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0시까지 강행군을 펼쳤다. 

엄정숙 씨는 “시니어 극단에서 활동할 때와 달리 실수를 하면 안 되고 한 동작 한 동작 의미를 담아 연기해야 해 부담이 컸다”면서 “연습을 거듭하면서 자신감이 붙었고 실수 없이 마무리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공연이 시작되고 생소한 시니어 배우들이 등장하자 일부 관객들은 의아한 표정을 짓기도 했다. 하지만 이내 세 배우가 극에 녹아드는 안정적인 연기를 펼치자 물음표는 느낌표로 바뀌었다. 공연이 막을 내린 후 커튼콜에서도 세 사람은 주연 못지않은 박수세례를 받기도 했다.

젊은 시절 고전무용을 전공하고 단편영화 등에도 출연했던 구재숙 씨는 “젊은 배우들이 이끌어 주고 관객들이 호의적으로 봐줘서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면서 “이번 경험을 바탕으로 봉사활동도 열정적으로 이어나가겠다”고 말했다. 

1978년 미스코리아 경남 ‘진’에 뽑힌 경력을 가진 손영옥 씨는 “우연히 시작한 연기를 통해 꿈의 무대인 대학로까지 진출해 영광”이라면서 “기회가 된다면 또 다시 대학로 무대에 도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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