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창간13주년] 1880년대 외국인이 본 조선의 이색 풍속
[백세시대 창간13주년] 1880년대 외국인이 본 조선의 이색 풍속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04.05 14:00
  • 호수 66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선인들이 즐긴 돌싸움… 사람이 죽어나가야 끝나”

캐나다인 제임스 S. 게일(1863~1937·사진)은 1888년 25세에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했다.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1890)을 비롯 심청전, 춘향전 등 40여권의 국영문 저서를 펴냈다. 한국에 온지 불과 7년만에 번역서를 낼 정도로 우리말에 통달했다. 한국인들 속에 살며 한학을 공부한 그가 조선의 마지막 10년을 겪은 뒤 ‘코리안 스케치스’(Korean Sketches)라는 제목의 책을 발간했다. 출판사 ‘책비’는 최근 이 책을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최재형 역)이란 제목으로 펴냈다. 책에서 인상 깊은 대목을 발췌해 싣는다.


거리에 널린 시체…명당자리 찾기 전까지 방치해

외국인 극진히 대접…선교 활동도 박해받지 않아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코리안 스케치스’(Korean Sketches)

당신이 아는 바와 같이 코리아는 일본이 중국으로 진출할 때 편리한 고속도로가 되어주는 남쪽으로 뻗친 반도국이며 인구는 1200만 명쯤으로 추정된다. 면적은 미국 유타주와 어림잡아 비슷한 크기이고 땅의 형상은 끊임없는 산의 연속이라서 여행할 때면 항상 그 너머에 어떤 풍경이 펼쳐질지 기대하게 되는 그런 곳이다.

조선인들은 스스로를 신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뭐 중국과 좀 섞이긴 했지만 이들이 자신만의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켜온 것만은 분명하다. 그들은 오래 전부터 양인 혹은 바다에서 온 사람이라고 하는 외국인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었다. 길가에 남아 있는 비석들에는 이런 글들이 새겨져 있다. “만약 네가 외국인을 만나면 죽여라. 그렇지 않고 놓아주는 자는 조국의 반역자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외국인이 조선 땅에 들어온 지 이제는 10년도 더 됐는데 그 기간 동안의 극심한 정치적 혼란 와중에서도 모든 외국인이 극진한 예로써 대접 받았을 뿐 유럽인이든 미국인이든 그 누구도 해를 입거나 협박 당한 경우가 없었다. 선교활동도 아무런 박해 없이 진행됐으며 이미 천명이 넘는 기독교인과 정기 예배를 위한 예배당이 마련돼 있었다.

때리면 맞고 복종하는 백성

한국 사람들은 어진 품성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곳 동방 전체에 만연한 소름 끼치는 관습에 대해 언급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처음 오는 사람들을 완전한 공포로 몰아넣는 것인데 바로 온 사방에 시체가 널려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시신을 자리에 둘둘 말아 그대로 익어 썩어가도록 햇볕 아래에다 방치해놓는다.

이곳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동소문(혜화문) 밖을 걷다가 자리에 덮인 백수십여구의 시체를 보았다. “저게 대체 뭐예요?”하고 내가 묻자 이런 대화가 이어졌다.

“시체예요.” “왜 땅에 묻지 않죠?” “못 묻어요. 먼저 묏자리를 쓸 명당부터 찾아야 돼요. 안 그러면 온 집안이 쑥대밭이 될 수 있으니까요.” 

1889년 3월 나는 첫 모험을 떠나보기로 결심했다. 난 믿을 만한 조선인에게 70달러를 쥐여 보내며 황해도의 중심도시 해주에 집을 하나 사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말 두 마리에 포졸 한 명, 시중 들 소년 한 명과 함께 해주로 향했다. 나와 동행했던 포졸은 혼자 전쟁이라도 치르듯 엄청 흥분해 있었다. 그는 특유의 빠른 걸음으로 내 조랑말 앞에서 뛰듯이 가곤 했는데 길에서 사람들을 마주치면 “길을 비켜라, 말에서 내려라, 담배 꺼라”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고는 번개처럼 그들을 후려갈겼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처참하게 두드려 맞고 차이면서도 어떤 경우에도 참고 복종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불러 당장 이런 짓을 그만 하라고 이야기한 뒤 나는 절대로 이렇게 깡패처럼 나라를 헤집고 다니는 것을 용인할 수 없으니 권력을 행사할 때는 반드시 내 허락을 구하라고 했다. 그는 자기 방식은 조선의 좋은 풍습이라고 설명하면서 내가 나라 곳곳을 행차할 때 그에 걸맞은 권위를 갖추지 않으면 아무도 나를 우러러보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이 행차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포졸을 해임시키고 일반 백성들하고 다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나중에야 깨닫게 됐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내가 서울을 떠날 때 어떤 사람이 각 고을의 사또들에게 위대한 분이 행차하신다는 전갈을 옆 고을 사또들에게 전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고을마다 사람들은 이 위대한 사람이 도대체 누구이고 어디를 가는지조차 묻지 않은 채 모두들 최대한의 예를 표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뿐이었다. 

땡볕에서도 숙면을 취하는 상놈

조선에 사는 외국인에게 상놈(상민, 일반 백성)보다 더 흥미로운 존재가 또 있을까. 그들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가 가진 가장 재밌는 특징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이들은 작열하는 동방의 태양 아래서 머리를 푹 숙이고 입을 활짝 벌린 채 잠들었다가는 마치 푹신한 침대에서 편히 잔 다음 아침에 일어나 목욕까지 끝낸 것처럼 상쾌하게 다시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리고 다시 담뱃대를 빼 물고 즐긴다.

상놈은 모든 욕구와 쾌락으로부터의 완전한 해탈을 보여주는 살아있는 가장 완벽한 증거였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밥을 먹을 수 있는데다가 외국인이 나뭇가지로 이쑤시개를 만드는데 걸리는 것 보다 훨씬 짧은 시간에 목침을 베고 잠들 수 있었다. 

조선의 백성이 즐기던 돌싸움(석전).
조선의 백성이 즐기던 돌싸움(석전).

딱 한번 상놈의 눈에 생기가 도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돌싸움에서였다. 그 고장에서 내로라하는 수백 명의 명사수들이 편을 가른 다음 한두 근쯤 되는 돌멩이로 무장한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공중에 돌멩이가 미사일처럼 수없이 날아가고 있었는데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유자재로 돌을 던지는 모습이 마치 거대한 투석기가 자동으로 발사하는 것 같았다. 먼지와 땀에 휩싸여 양편은 점점 가까워졌다. 그러다가 갑작스런 중단. 마치 골이라도 넣은 듯 터지는 함성. 상대편의 최고 사수가 정확히 강타 당했고 즉사했다. 곧 그의 시신이 싸움터에서 치워진다. 그리고 싸움은 다시 시작된다. 저녁이 오기 전에 다른 편에서도 한 사람이 쓰러졌다. 그렇게 결과는 동점이었다. 

나에게 조선이란 전 세계에서 가장 마음이 끌리는 나라인데 좋은 날씨에 점잖고 신의 있고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하며 그네들의 말과 오랜 풍습은 아주 흥미로운 데다 아름다운 자연 경관도 지천에 널려 있다. 청둥오리, 거위, 칠면조들은 골짜기마다 지천이었고 사슴 떼도 먹이를 찾아 조심스럽게 골짜기를 내려왔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제일이었던 것은 자신의 존재를 자주 드러내는 호랑이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우리는 나무와 돌로 만들어놓은 호랑이 덫을 조심해야 했다. 호랑이가 들어가면 문이 내려와 닫히는 것이었는데 호랑이들도 약아서 쉽게 걸리진 않았다. 우리 바로 근처에도 호랑이들이 많이 있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호랑이 발자국을 보면 우리가 다니는 길을 똑같이 다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성은 후손을 잇는 수단일 뿐

조선인의 사고방식은 서양 사람들과 달랐다. 사랑보다는 실생활의 쓰임새가 먼저였다. 동양 사람들 사고방식으로는 아낌없이 주는 사랑이란 개념 자체가 완전히 이질적인 것이다. 

남편은 사랑하지 않는 아내와 결혼하는데 이것은 동양인들의 사고방식으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이들에게 아내는 사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한 집안의 대를 이어주는 데 필요한 수동적인 존재일 뿐이었다. 아내는 이렇게 진창 속에 깊이 박힌 채 조상으로부터 후손을 이어주는 다리 역할로 자신에게 지워진 삶의 무게를 묵묵히 견뎌내고 있었다.

한번은 길을 걷다가 고대 뱃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가 바위에 앉아 절망하며 펑펑 우는 것을 본 적이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남자는 “아내가 죽었다”며 “아이고, 아이고” 하고 곡을 했다. 나는 사랑의 실체를 제대로 찾아낸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다시 이렇게 물었다. “하지만 아내가 당신을 사랑하지 않았을 텐데 왜 아내를 사랑하나요?”

“사랑? 누가 마누라를 사랑한다고 그랬어요? 마누라가 내 옷도 지어주고 밥도 해줬는데 이제 마누라 없이 어찌 살란 말이요? 아이고, 아이고!”

교육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서로 대척점에 있다. 서양에서 교육이란 정신을 함양하기 위한 재능의 연마임에 비해 조선에서 교육이란 발에 붕대를 감는 것처럼 정신에 석고 깁스를 둘러치는 것이었다. 조선인들은 교육을 현재에 눈 감고 과거만 바라보고 살도록 한 사람의 정신을 개조하거나 압사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우리는 발전을 생각하지만 그들은 통제를 생각한다. 서양의 학생은 학업 성취와 새로 알게 된 갖가지 것에 기쁨을 느끼지만 조선 사람들은 무엇을 배워 안다는 것보다는 단지 한자를 읽고 쓰는 것에서만 성취를 느꼈다. 단지 한자를 익히기 위해 20년을 독거하면서 공부하는데 이렇게 오랜 기간을 공부하고도 많은 수의 학생은 한자 공부조차 실패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다른 누구보다도 유학자들이 더 기독교의 전도에 반대했다.    

지난 8년 동안 내가 조선반도를 열두 번이나 그것도 매번 다른 계절에 다른 경로로 종횡무진했던 것은 사실 고난이었다. 하지만 어떤 미국인이나 유럽인도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나와 같은 다양한 경험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오현주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