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서민의 삶을 노래한 가수 김용환
[백세시대 / 금요칼럼] 서민의 삶을 노래한 가수 김용환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9.04.12 13:41
  • 호수 6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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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가이자 가수였던 김용환

1930년대 ‘만요(漫謠) 불러 히트

‘낙화유수 호텔’ 등을 들으면

밤거리 노점상 등 당시 모습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

한국대중음악사 전체를 통틀어 작사와 작곡과 노래를 겸했던 만능 대중음악인은 그리 흔하지 않습니다. 그 전형적 표본에 드는 음악인으로 우리는 김용환(金龍煥, 1909  ~1949)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작곡과 가창을 겸하는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뛰어난 독보성(獨步性)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함남 원산 출생의 김용환은 아우 김정구, 김정현, 누이동생 김안라, 아내 정재덕 등을 포괄하여 지역의 출중한 음악가 집안이었습니다. 원래 김용환은 원산지역의 소규모 연극조직이었던 ‘동방예술단(일명 조선연극공장)’에서 연극배우 겸 가수로 출발했습니다. 작곡가로서 맨 처음 데뷔한 것은 조선일보의 가사모집에서 신민요 ‘두만강 뱃사공’이 당선되고부터입니다. 이 경력이 바탕이 되어 1932년 근대식 레코드회사들의 조선 진출에 따라 서울의 포리돌레코드사에서 전속작곡가 겸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날 노래 이름만 들어도 그 시절이 기억되는 ‘구십리 고개’, ‘노다지 타령’, ‘모던 관상쟁이’, ‘낙화유수 호텔’, ‘이 꼴 저 꼴’, ‘장모님전 항의’ 등의 노래가 바로 김용환이 히트시킨 작품들입니다. 김용환의 노래를 귀 기울여 가만히 듣노라면 마치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꾼의 소탈하고도 호방한 창법에 서민적 삶의 정겹고 구수한 향취마저 느껴집니다. 뭐랄까, 민중적 넉살이랄까요? 그 넉살도 노래의 바탕에 따뜻한 슬픔과 연민이 살포시 깔려 있는 여유로움의 과시이지요. 나라의 주권이 이민족에게 빼앗겨 유린과 압박을 당하던 시기에서 이러한 창법의 효과는 우리 민족의 고유한 전통성을 지켜가는 일에 매우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조명암의 여러 가요시도 절창이 많지만 김용환의 구슬픈 페이소스의 작품은 이 노래를 듣고 부르는 전체 한국인의 가슴을 마구 도려내고 눈에서는 사뭇 뜨거운 눈물을 저절로 쏟게 만들었습니다. 김용환이 가수로서의 재주를 듬뿍 뽐내고 있는 작품으로는 ‘낙화유수 호텔’을 비롯한 ‘모던 관상쟁이’, ‘술 취한 진서방’, ‘눈깔 먼 노다지’, ‘복덕장사’, ‘장모님전 항의’ 등과 같은 만요풍(漫謠風)의 노래들입니다. 그밖에도 ‘님 전 화풀이’, ‘꼴망태 목동’, ‘세기말의 노래’, ‘구십 리 고개’, ‘노다지 타령’, ‘아주까리 선창’ 등 작곡 솜씨가 두드러진 작품들도 들을 만합니다. ‘장기타령’, ‘정어리타령’, ‘흥야라타령’ 등의 노래는 김용환의 이미지를 신민요의 달인으로 확정시켜 주었습니다. 1935년 잡지 ‘삼천리’가 실시했던 ‘레코드가수 인기투표 결선’에서 김용환은 채규엽(蔡奎燁, 1906~1949)의 뒤를 위어 당당히 2위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잘 알려져 있는 바처럼 만요(漫謠)란 우스꽝스럽고 익살스런 분위기의 노래를 말합니다. 하지만 표면에 드러나는 웃음 뒤에는 대개 눈물의 현실, 모순과 부조리의 세태를 고발하고 풍자하려는 의도가 감추어져 있지요. 슬프고도 아름다운 가요작품 '낙화유수 호텔'은 한국의 만요 중에서도 매우 수준 높은 작품에 속합니다.

우리 옆방 음악가 신구잡가 음악가/ 머리는 상고머리 알록달록 주근깨/ 으스름 가스불에 바요링을 맞추어/ (대사) 자 창부타령 노랫가락 개성난봉가/ 자 뭐든지 없는 거 빼놓곤 다 있습니다/ 에 또 눈물 콧물 막 쏟아지는 ‘낙화유수’, ‘세 동무’/ 자 십 전입니다 단돈 십 전 십 전

싸구려 싸구려 창가 책이 싸구려 창가 책이 싸구려    

-만요 ‘낙화유수 호텔’ 1절

밤 깊은 길거리에서 카바이트 불빛을 밝혀놓고 노래책을 팔고 있는 밤거리 서적상의 광경이 그림처럼 1절에 그려져 있습니다. 그 노점상 청년의 외모는 모발을 3cm 정도로 짧게 깎고 얼굴에는 온통 주근깨투성이인데 별명이 음악가로 불립니다. 조명은 타들어가는 소리가 쏴하고 요란하게 들리는 카바이트 불을 환히 밝히고 있네요. 청년은 바이올린 연주를 하다가 악기를 내려놓고 혼자서 외칩니다. 단돈 십전짜리 창가 책 ‘신구잡가(新舊雜歌)’를 목청 높여 판촉(販促)해보지만 지나는 행인들은 별반 거들떠보지 않습니다. ‘낙화유수’ ‘세 동무’ 같은 1920년대 무성영화 주제가들의 제목도 보입니다.

작품 전체에서는 1930년대 후반, 식민지사회 밑바닥 인생들의 구체적 삶이 실감나게 느껴질 뿐만 아니라 바람 찬 밤거리에서 외치는 그들의 생생한 소리가 그대로 들려오는 듯합니다. 그 시대와 사회적 환경의 전형적 풍물을 이보다 더 실감나게 담아낸 노래나 문학작품이 어디 있으리오. 이 작품의 진정한 가치는 바로 이런 점에서 확인이 됩니다. 이 노래의 가창과 대사 일체를 김용환은 자신만이 지닌 특유의 독보적 재능으로 너끈히 소화시켜 내었습니다. 이후 김용환은 ‘가거라 초립동’을 또 한 차례 크게 히트시킨 다음, 1949년 40세를 일기로 홀연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더욱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아까운 나이에 너무도 일찍 서둘러 저 세상으로 떠나버린 한 천재적 대중음악인의 이름이 새삼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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