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코미디 같은 여론조사
[백세시대 / 세상읽기] 코미디 같은 여론조사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04.26 13:59
  • 호수 6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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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장이 첨보는 음식을 들고 나왔다. 손님은 맛이 별로란 반응을 보였다. 그러자 주방장이 “그럴 리가…대통령을 위시해 셀럽(유명인사)들이 비싼 값을 치르고 먹는 그 유명한 음식인데”라고 말했다. 그러자 손님은 “아 그래요, 어쩐지 맛이 다르더라”라고 바로 자세를 낮췄다. 

이런 코미디가 최근 정치판에서 벌어졌다.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에 대한 여론조사 얘기다. 처음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분명히 부적격(55%)이 적격(29%)을 훨씬 앞섰다. ‘그럼, 그렇지. 국민은 정확히 보고 있다’고 느꼈다. 

그런데 며칠 후인가, 리얼미터가 같은 주제를 놓고 또 다시 여론조사를 했는데 결과가 이상했다. 이번엔 찬성이 43%, 반대가 44%로 찬성하는 쪽이 확 늘었다. 며칠 사이에 여론이 이렇게 바뀌는 일도 있나, 의아심이 들었지만 관심을 껐다. 며칠 후 조·중·동 신문들이 이 문제를 시간차로 다루며 ‘여론조사가 아니라 여론조작’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는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와 관련해 2차례 여론조사를 했다. 그런데 질문이 그때마다 달랐다. 이런 식이다. 첫 번째 조사에서는 “최근 이미선 후보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가 열렸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이 후보자의 헌법재판관으로서의 자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이때 부적격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두 번째 조사 때는 이렇게 물었다. “여야 정치권이 이 후보자의 임명을 두고 대립하는 가운데 문재인 대통령은 이 후보자에 대한 청문보고서를 국회에 다시 요청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문 대통령이 이 후보자를 헌법재판관으로 임명하는데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이때는 임명 반대 응답이 찬성 응답에 비해 소폭 높게 나왔다. 조삼모사(朝三暮四)를 넘어 기만에 가깝다. 

첫 번째 조사결과가 발표된 다음날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중대한 흠결이 없다”며 “(여론조사를 다시 한 번 하면) 더 좋게 나올 것이라고 예상한다”라고 했다. 이 대표의 주장에 화답이라도 하듯 리얼미터는 이틀 뒤 이 후보자 임명 찬성과 반대가 비슷하다며 확 바뀐 여론조사 결과를 내놓았다. 그 직후 해외순방 중인 문재인 대통령은 전자 결재로 이 후보자의 임명을 강행했다. 여권 입맛에 맞는 여론조사가 임명의 정당성을 뒷받침해준 것이다.

리얼미터는 해명자료에서 “정국 대립 지점이 바뀌었다면 바뀐 대립 지점으로 조사하는 것이 상식이다. 서로 다른 질문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주제나 소재이고 복수의 정보가 존재한다면 여론의 흐름을 분석하는 데는 크게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리얼미터와 다른 의견을 냈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문항이 조금이라도 다르면 조사 결과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여론이 어떻게 바뀌는지 보려면 같은 질문으로 물었어야 했다”며 “이번 리얼미터 여론조사의 ‘질문 바꾸기’는 (사회 조사) 교과서에 사례로 넣고 싶은 사건”이라고 덧붙였다. 즉, 사회과학도에게 다른 설문 문항으로 여론조사를 했다면 두 여론조사 결과는 절대 동일선상에서 비교해선 안된다는 내용을 쉽게 설명하기에 이번 논란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는 얘기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첫 번째 조사는 순수하게 이 후보자에 대한 평가를 묻는 것이라면 두 번째 조사는 문 대통령의 정치적 행위에 관해 묻는 것이기에 정파성이 반영될 수밖에 없다. 그걸 갖고 여론이 변했다고 단정하는 건 무리”라고 말했다.

임운택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정치현실에서 대통령 이름 하나 들어가는 게 응답에 큰 변화를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리얼미터가 매주 발표하는 국정지지도 및 정당지지도 조사는 대부분 ARS를 통해 이뤄지며 응답률은 5% 안팎이다. 100명에게 물었을 때 대답하는 이가 5명 내외다. 낮은 응답률은 조사에 거부감이 적은 집단의 특유한 편향이 반영될 여지를 넓힌다. 

여론조사를 통치 행위에 이용하는 건 일인 독재 사회주의에서나 벌어지는 일이다. 통계 수치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통계청장을 경질했던 게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니다.

적어도 견제와 감시, 자율과 소통이 허락된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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