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 전, 동‧서양, 옛것과 새것이 공존했던 근대 서화 한눈에
국립중앙박물관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 전, 동‧서양, 옛것과 새것이 공존했던 근대 서화 한눈에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4.26 14:38
  • 호수 66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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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배성호기자]

안중식, 조석진 등 서화협회 회원 중심 100여년전의 한국 미술 조명

백악산 경복궁 묘사한 ‘백악춘효’, 무릉도원 그린 ‘도원행주도’ 눈길

서양화와 동양화 느낌을 동시에 주는 안중식의 ‘도원행주도’.
안중식의 ‘백악춘효’ 여름본.

지난 4월 19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백악산(청와대 뒷산)의 ‘여름’과 ‘가을’이 걸려있었다. 심전(心田) 안중식(1861~1919)이 1915년 그린 ‘백악춘효’(白岳春曉,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서울 중심부 백악산과 경복궁을 묘사한 그림이다 서양화의 투시도법을 적용해 원근감을 살리면서도, 백악산을 동양화풍으로 웅장하게 묘사했다. 안중식은 근대 화단에 큰 족적을 남겼다. 조선시대 최초의 미술 연구기관인 서화미술회(1911)를 세워 후진을 양성했고 만년인 1919년에 서화협회를 창립해 회장이 된다. 

이런 안중식의 서거 100주기를 맞아 국립중앙박물관에선 20세기 전환기의 한국 근대 서화(書畵)를 조명하는 특별전 ‘근대 서화, 봄 새벽을 깨우다’가 열리고 있다. 안중식의 ‘백악춘효’를 비롯해 근대 서화가들의 그림과 글씨, 사진, 삽화 등 작품 100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동양과 서양, 옛것과 새것, 전통과 현대가 공존하던 혼돈의 시대에 서화가들이 남긴 유산과 근대 서화가들이 꿈꿨던 새로운 길을 들여다본다. 전시는 ‘서화의 신세대’부터 ‘새로운 도전과 모색’까지 총 6부로 구성된다. 안중식 외에도 조석진, 오세창, 지운영, 황철, 강진희를 비롯한 서화가들뿐만 아니라 김옥균, 박영효, 민영익 등 개화 지식인들이 근대 서화의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는 양상을 살펴본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맨 먼저 강진희의 ‘승일반송도·삼심육성도’가 관람객을 맞는다. 강진희는 1887년 초대 주미전권공사 박정양의 미국 부임시 수행원으로 참여했는데 이때 고종과 순종의 탄신일을 기념해 작품을 남겼다. ‘승일반송도’는 음력 7월 25일 고종의 탄신일을 기념해 그린 작품으로 왕을 상징하는 떠오르는 해를 배경으로 장수를 상징하는 소나무, 영지, 구름을 빠른 붓으로 그려냈다. ‘삼산육성도’는 음력 2월 8일 순종 탄신일을 기념해 제작한 것으로 구름에 둘러 쌓인 세 개의 산봉우리가 인상적이다.

일본 도치기현 사노시향토박물관에서 대여한 김옥균과 박영효의 글도 눈길을 끈다. 갑신정변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과 박영효는 후원자 스나가 하지메를 만난다. 스나가 하지메는 당시 망명온 한국인을 후원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서화품을 보유하게 됐다. 그가 소장한 서화품을 바탕으로 사노시향토박물관이 세워졌다. 이런 이유로 김옥균이 일본인 스나가 하지메에게 쓴 글엔 ‘도가 통하면 하늘과 땅이 같은 곳’이라는 의미를 담아 일본인 후원자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다. 

박영효가 쓴 글씨는 부채에 담겨 있는데 조선 전기 무신인 남이 장군의 북정가를 옮긴 것이다. 북정가는 ‘백두산석마도진 (白頭山石磨刀盡)/ 두만강파음마무 (頭滿江波飮馬無)/ 남아이십미평국(男兒二十未平國)/ 후세수칭대장부 (後世誰稱大丈夫)’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서 다 없애고.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라. 사나이 스무살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겠는가’로 풀이된다. 갑신정변 실패 후 암울한 나날 속에 재기를 모색하던 박영효의 절절한 심정이 묻어 있다. 

중국과 일본을 오가며 중국풍과 일본풍의 서화를 그려낸 안중식의 작품은 전시의 백미다. 서울에서 태어난 안중식은 1881년 중국 톈진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1889년 일본 교토 등지에서 머물다 1901년 귀국했다. 그는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 어진(御眞·임금 초상화) 제작에 함께 참여한 조석진과 더불어 국내 화단을 이끌었고, 이도영과 고희동 같은 제자로 길러냈다.

안중식과 조석진은 병풍인 ‘그릇과 꽃가지, 과일’을 함께 그리기도 했다. 또 두 사람은 고종의 즉위 40년을 기념하는 어진 제작에 나란히 참여했다. 이들은 고종이 총애했던 마지막 궁중화가였다. 두 사람은 종종 함께 작품을 그렸고 화단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근대 서화의 복잡하고 다채로운 면모는 안중식이 1915년에 그린 ‘도원행주도’(桃源行舟圖)에도 잘 나타난다. 화면에 산세를 중첩해 배치하고, 녹색과 분홍색으로 화려하게 채색해 복사꽃이 만발한 무릉도원을 나타냈는데 동양화 같기도 하고, 서양화 느낌도 풍기는 작품이다.

전시 말미에는 안중식의 세계관이 엿보이는 ‘양양화관’ 글씨를 볼 수 있다. 동서양이 함께한다는 의미인 ‘양양화관’은 안중식 자신은 서양화를 수용하지 못했지만 서양화를 배웠던 제자를 존중하는 마음이 담겼다. 

뿐만 아니라 일본화에 영향을 받은 김은호, 최우석, 우리 역사를 소재로 다룬 이도영의 기명절지(그릇과 꽃, 나뭇가지를 그린 것)와 고사인물화, 1923년 동연사(同硏社)를 결성해 새 서화창작을 모색한 변관식과 이용우, 노수현의 작품은 안중식 사후 새롭게 변하기 시작한 근대 서화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중 노수현의 작품 ‘신록(新綠)’은 강당 등 공적 공간에 전시용으로 제작된 작품으로 추정되며 실경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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