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르신들이 평생 일궈온 삶의 터전에서 내쫓기고 있다. 팔도 방방곡곡 어디서나 지역경제 부흥을 앞세운 개발 열기에 들끓고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넘게 정을 붙이고 삶의 체취를 묻어온 그 땅을, 고개를 한껏 젖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고층빌딩들이 점령하고 있다. 도심 한 복판에 홀로 남겨지는 것이 무서워 그리운 자식들도 마다고 긴 세월 나서 자란 그 터를 지키고 있건만 불도저와 굴삭기 앞에서는 당해낼 재간이 없다. 서울시가 뉴타운 개발로 사라지는 옛 동네 모습을 일부나마 보존키로 한 것은 그래도 다행스러운 일. 지금도 어르신들은 낯선 땅으로 쫓겨나고 있다. 개발을 강요하는 시(市)와 보존을 울부짖는 주민들의 치열한 공방의 현장, 인천 배다리 헌책골목에서 어르신들의 애환을 엿보았다.
도시재생사업이 몇 십년간 터를 지키며 살아왔던 어르신들의 삶과 문화를 송두리째 위협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인천시와 ‘배다리를 지키는 시민모임’이 벌이는 공방이다. 인천시는 물류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금곡동을 가로지르는 너비 50m가 넘는 8차선 산업도로 건설을 강행하고자 하고, 주민들은 그다지 큰 효용도 없는 도로로 말미암아 주민의 생활은 물론 100여 년간 지켜왔던 고유의 구도심 문화가 파괴된다며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인천 동구의 구도심 일대는 지난 수십 년간 낡고 허름한 거리풍경에 큰 변화가 없었다. 개발에서 비껴나 있던 만큼 옛 건물과 지금은 사라진 많은 풍경들이 보존돼 있다. 19세기 말 개항 이래의 역사문화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인천의 살아 있는 박물관으로 불리는 곳이다.
1920년대 당시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었던 소성주(소주의 일종)를 제조했던 옛 인천양조장 건물, 옛 성냥공장, 공예거리, 달동네박물관 등이 몰려 있어 시간을 거슬러 온 느낌이 들게 한다. 그리고 1897년 한국 최초의 철도공사가 시작된 지점(옛 우각역)을 비롯해 인천의 첫 사립학교인 영화학교(1892년 개교), 올해 개교 100년을 맞은 창영초교, 1890년대 선교사들이 지은 알렌 별장 터, 미국 감리회 한국여선교사 합숙소 등 역사 건축물들도 즐비하다.
60년대 말에서 70년대까지 40여 곳이 성업했다는 인천의 배다리 헌책골목도 있다. 현재는 10여 곳이 남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낡고 허름하지만 책곰팡이 냄새처럼 정겨운 풍경이다.
그러나 최근 경제자유구역사업과 대규모 도시재생사업이 벌어지면서 지역문화파괴, 토지보상과 개발방식, 환경문제 등을 놓고 시와 주민들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다. 배다리 헌책방 골목에는 관통도로가 놓일 예정이어서 그동안 명맥을 유지해 왔던 헌책 골목과 근대의 역사를 간직한 풍경들이 모두 사라질 위기다.
문화재의 문제만은 아니다. 주변의 주민들은 영세한 어르신들이 많다. 10평정도의 지분을 보상받는다 해도 4000만원 남짓의 보상금을 받고 다른 곳으로 내몰릴 형편이다. 보상금이 많고 적음을 떠나 이들은 지난 수십 년간 이곳에서 터를 잡고 살아와 다른 곳에서 새로 터를 잡고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40여년 전 이곳에 터를 잡았다는 삼성서림의 이진규(72) 어르신은 “나는 이곳이 좋은데, 왜 자꾸 나가라고만 하는지, 나가서 어디서 이 손때 묻은 책들을 쌓아놓는단 말이냐”며 절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인천시는 90년대 후반 이후 동북아 중심도시로 도약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야심차게 추진해 왔다. 인천 국제공항이 개항되고, 송도와 구월동 일대를 대대적으로 개발하면서 인천의 지도는 크게 달라졌다.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면서 구도심 지역을 개발하려는 계획을 추진함에 따라 인천시 전체가 개발을 위한 공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개발 과정에서 주민들과 크고 작은 마찰을 빚었다.
지난 시간 지역을 지켜온 원주민은 개발된 부지의 땅값을 견디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게 마련이고 지난 100여 년간 형성돼 온 지역의 문화는 하루아침에 뒤엎어지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지역에서 오래 생활해 온 원주민은 대부분 고령층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현업을 포기하고 낯선 곳에서 정착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보상금으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금곡동의 아벨서점 대표인 곽현숙(59)씨는 “그동안 낙후된 구도심 지역에 경제, 문화적 혜택을 주어 고유의 문화를 살리기는 커녕, 송두리째 갈아엎고 30~40층 빌딩을 세우는 것이 과연 누구를 위한 ‘개발’이냐”고 묻는다.
현재, 배다리 관통도로 개통을 놓고 주민들과 시의 갈등이 장기화되면서 지역의 주민 뿐 아니라 교수, 문화예술 관계자, 시민단체들이 연합해 주민대책위원회를 결성해 시의 개발에 맞서고 있는 형편이다.
홍성태 상지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는 6월 5일 국회의원회관 소강당에서 열린 지역현안 긴급 포럼에서 “인천의 배다리는 낙후했지만 인천의 근대를 간직한 또 다른 문화공간”이라며 “시민의 생활문화를 지키지 않고서는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지킬 길은 없다”고 말했다. 또 일본의 200여 헌책방이 밀집해 있는 진보초 헌책방 거리를 소개하면서 한국에도 청계천이나 배다리 지역이 이 같은 문화공간으로 발전하지 못할 이유가 있느냐고 물었다.
경제적 경쟁력만을 강조하면서 지난 문화의 가치를 손쉽게 폄하해 버린다면 어르신을 공경하는 문화 역시 같은 이유로 파기해 버릴 수 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에는 1000년이 넘는 로마시대 도로가 아직도 굳건히 도심의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다. 단지 경제적 이유로 따진다면 벌써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포장해 버렸을 도로다.
배다리 지역문화를 일구고 터전을 지켜온 원주민 어르신들의 삶을 개발이라는 논리로 손쉽게 파기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어 보인다.
함문식 기자 hammoonsik@100ssd.co.kr
1953년의 송림학교 앞 시장 풍경. 한국전쟁 직후 이곳 시장은 강화, 시흥 등 경기 서남부 지역의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큰 시장이었다.
인천 구도심 금곡동의 헌책방 거리. 한때 40여 곳이 성업했던 이 거리는 현재 10여 곳이 남아 간신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헌책방은 새책 서점과는 달리 책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곳이다. 새 책이 상품으로 기능한다면 헌책은 세월을 이겨내고 독자와 저자가 세월을 넘어 호흡할 수 있는 공간으로 기능한다.
손으로 쓴 민요교실 간판. 인천의 구도심에는 아직도 옛 정취들이 많이 남아있다.
헌책방거리 초입 국제서점 벽면의 벽화. 인천의 문화연대를 비롯한 많은 시민들이 배다리 헌책골목을 문화공간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