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문화유산 등재 확실시 되는 9개 서원 “한국의 서원들, 성리학의 거점이자 경관 빼어나”
세계문화유산 등재 확실시 되는 9개 서원 “한국의 서원들, 성리학의 거점이자 경관 빼어나”
  • 이수연 기자
  • 승인 2019.05.24 13:45
  • 호수 67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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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시대=이수연기자]

유네스코에 재도전해 등재 눈앞… 성리학 ‘예’ 실천‧존속해 높은 점수

덜 알려진 함양 남계서원, 장성 팔암서원, 정읍 무성서원에 관심 커져

세계유산위원회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이코모스)가 한국의 서원에 대해 등재가 확실시되는 ‘등재 권고’ 통보를 했다. 이코모스는 각국이 등재 신청한 유산을 조사한 뒤 4가지 권고안인 등재 권고, 보류, 반려, 등재 불가 중 하나를 결정한다. 등재 권고를 받으면 이변이 없는 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이 관례다. 

따라서 6월 30일부터 7월 10일까지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개막하는 제43차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되면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다. 이렇게 될 경우 우리나라는 총 14건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게 된다. 

◇재도전에 ‘등재 권고’ 받은 한국의 서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될 서원 9곳은 조선의 첫 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 도산서원,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대구 달성 도동서원, 경남 함양 남계서원, 전남 장성 필암서원, 전북 정읍 무성서원, 충남 논산 돈암서원 등이다.

이들 서원은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됐으며, 우리나라에 남은 637개 사원 중 보존‧관리가 잘 되고 있으면서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빼어난 서원들로 꼽힌다. 

이번 세계유산 등재는 재도전을 통한 성공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문화재청은 지난 2016년 이코모스로부터 ‘반려’ 판정을 받아 세계유산 신청을 자진 철회했다. 당시 이코모스는 “9개의 개별 서원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는지 알 수 없고, 서원 건축물뿐만 아니라 주변 자연경관이 함께 보호‧관리돼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고 평가했다. 

이후 문화재청은 비교 연구를 보완하며, 연속 유산으로서의 논리를 강화해 등재 신청서를 새롭게 제출한 후 약 1년 반 동안 심사를 받았다. 심사 결과 조선시대 사회 전반에 널리 보편화되었던 성리학의 탁월한 증거이자 성리학의 예(禮)를 꾸준히 실천하고 존속한 점 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또한 성리학을 지역으로 전파하는 데 이바지하고, 본래의 기능을 유지한 것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건축과 주변 경관이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점도 부각됐다. 대부분의 서원은 뒤쪽에 산을 등지고 앞쪽으로는 시야가 트이면서 들이나 강을 바라보는 산기슭에 자리 잡았다. 

◇덜 주목받은 서원들도 관심 높아져

서원은 공부하는 곳임과 더불어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이다. 명망 있는 선현을 모심으로 학적 정통성과 사회적 위치가 강화되기도 했다. 9곳의 서원이 대부분 잘 알려졌지만, 경남 함양의 남계서원,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 전북 정읍의 무성서원, 충남 논산의 돈암서원 등은 비교적 생소하다. 

남계서원은 현존하는 서원 건축물 가운데 소수서원 다음으로 오래된 서원이다. 조선 전기 문신인 정여창을 배향하고 있다. 함양이 뼈대 있는 곳임을 자랑하는 말 중 ‘좌강 안동이나 우강 함양이다’라는 말이 있다. 낙동강 동쪽에서는 안동이 훌륭한 인물을 많이 낳았다면, 낙동강 서쪽에서는 함양이 그러한 곳이라는 뜻이다. 

정여창은 ‘우강 함양’의 기틀을 이룬 이로 16세기 전반 중앙 정계에 관료로 진출한 인물이다. 조선 전기 사림파의 대표 학자로 남계서원은 그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1552년 창건됐고, 1566년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내려 공인받게 되었다. 사액은 국가에서 내리는 서원의 액자 간판으로 국가에서 운영을 지원하는 국립교육기관으로 공인받는 것을 의미한다. 

필암서원은 김인후와 그의 학맥을 이은 사위 양자징을 받들고 있다. 김인후는 장성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어 신동 소리를 들었고, 커서는 김안국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1540년 문과에 합격하고, 1543년 당시 세자였던 인종을 가르쳤다. 인종이 즉위하고 9개월 만에 사망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만 정진하였다. 

필암서원은 1590년 호남의 유림들이 김인후를 추모하기 위해 창건됐다. 평지에 세워진 서원으로 건물 규모는 총 16동이다. 서원 앞으로는 비교적 큰 하천인 문필천이 흐르고, 뒤쪽으로는 높지 않은 산들이 병풍처럼 서원을 감싸고 있다. 

무성서원은 우리나라 유학자의 효시로 꼽히는 최치원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다. 고을 현감을 지내며 훌륭한 치적을 쌓은 최치원이 합천 군수로 전출되자 그를 기리기 위해 마을 선비들이 모여 생사당 태산사를 지었다. 이후 1483년 퇴락한 태산사를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고, 1696년에 ‘무성’이라는 사액을 받아 무성서원이 되었다. 

무성서원에는 최치원 말고도 조선시대의 유명한 유학자인 신잠, 정극인, 송세림, 정언충, 김약묵, 김관 등이 배향되었다. 다른 서원들과 달리 배움의 장인 ‘재실’이 담 밖에 세워졌다는 특징이 있다.     이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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