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제물포고 같은 학교가 많아져야 한다”
[백세시대 / 세상읽기] “제물포고 같은 학교가 많아져야 한다”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05.31 14:45
  • 호수 67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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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제물포고는 60년 이상 무감독시험제를 시행 중이다. 중간·기말고사 같은 시험을 보는 교실에 선생이 없다는 얘기다. 선생은 시험 시작 직전 교실에 들어가 시험지와 답안지를 나눠주고 학생들은 다음과 같은 선서를 외친다. 

“무감독시험은 양심을 키우는 우리 학교의 자랑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무감독 시험의 정신을 생명으로 압니다. 양심은 나를 성장시키는 영혼의 소리입니다.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서는 우리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후 선생이 없는 가운데 시험이 치러진다. 시험 종료 10분 전에 선생이 입실해 시험지와 답안지를 걷어간다. 이런 멋진 제도를 처음 도입한 이는 독립운동가였던 故 길영희 초대교장이다. 길 교장은 무감독시험 첫 시행 후 이 제도의 성공적인 안착을 확신했다고 한다.

첫 시험에서 전교생 569명 중 53명이 평균 60점 이하의 낙제점을 받았다. 그러자 길 교장은 “여러분은 얼마든지 커닝을 할 수 있었지만 양심을 지켜 낙제했다. 여러분 같은 학생을 만나 매우 기쁘다”며 이 학생들을 영웅으로 칭하고 1년간 학비까지 면제해주었다. 다음 학기에 이들은 모두 좋은 성적을 내 낙제를 면한 것은 물론이다. 

제물포고 출신의 박준현 전 삼성증권 대표이사는 “무감독시험에 익숙해 있다가 사회에 진출하니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게 때론 손해를 보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요령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더니 내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있었다”고 술회했다.

이 학교가 지키고자 한 양심은 ‘명예규율’과 통한다. 영어로 ‘아너 코드’(Honor Code)라고 하는 명예규율은 구성원들이 단체의 명예를 위해 반드시 지켜야할 기본적인 준칙들을 의미한다. 명예규율의 준칙은 구성원의 도덕성과 윤리의식에 근거하여 정해지며 구성원들 사이의 절대적인 신뢰가 필요하다. 명예규율을 위반한 구성원이 발견될 경우 단체는 위반자의 윤리의식을 문제 삼을 뿐 아니라 해당 집단의 존속을 위협하는 구성원이라고 간주하고 강력한 수준의 처벌을 가한다. 

명예규율에 의존해 운용되는 시스템을 명예시스템(honor system)이라고 한다. 공동체와 스스로의 가치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대한노인회 회원의 명예규율은 청년에게 솔선수범하고 경로효친 윤리관과 전통적 가족제도가 유지 발전되도록 노력하는 것이고 경영자의 명예규율은 이익 우선의 무한경쟁 하에서도 최소한의 상도덕을 지켜야 하는 것이고 기자의 명예규율은 취재원을 보호하는 인도적인 면의 취재 준칙(?) 실행 같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예규율에 기반한 이 사회가 한두 명의 위반자들 때문에 손쉽게 무너지는 것을 목격한다. 명예규율이 손상되면 믿음과 신뢰도 함께 사라지고 회복이 힘들다. 명예규율이 사라진 자리에는 대신 국가의 촘촘한 규제가 자리를 차지한다. 공동체 구성원들은 국가의 규제에 따라오는 의심과 규제를 달게 받아야 한다. 

친지의 조의금은 얼마이고, 스승의 가슴에 꽃을 달아주는 게 법에 저촉되는지 따위를 국가로부터 유권해석을 받아야 한다. 그래도 개개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참담한 심정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명예규율이 사라지고 법적 규제가 판을 치는 자리는 오히려 전문가 집단이 판을 치며 그들만의 리그를 만든다. 명시된 규제만 영리하게 피해가면 더 중요하고 더 위대하고 더 도전적이고 더 창의적인 것들을 굳이 고민하고 정면으로 다루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명예규율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나지 않는다. 시간과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1명의 위반자가 생겨나는 순간 나머지 99명의 다수는 참담한 심정으로 말없이 지켜보고 있고 1명의 위반자에게 돌아가는 처벌을 99명이 영원히 감수하게 된다. 

이 사회가 명예규율을 지켜나가기 위해선 제물포고 같은 학교가 더 많아져야 한다. 각자가 자기 위치에서 스스로의 전문성과 가치를 믿고 스스로에게 자랑스러운 명예규율을 만들어나가야 이상적인 공동체의 존속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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