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가수 김안라의 잘못된 선택
[백세시대 / 금요칼럼] 가수 김안라의 잘못된 선택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9.06.07 11:26
  • 호수 67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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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난 음악적 재능의 김안라는

정통 성악가를 지향하다

대중 가수의 길로 들어서

시대의 조류에 편승하다

친일활동에 나선 건 안타까워

어떤 특정한 재주를 남다르게 지닌 가문이나 혈통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가수 김안라(金安羅, 1914∼1974)의 가계가 그러합니다. 1914년 함경남도 원산의 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김안라는 4남매 중 둘째였는데 맏오빠는 초창기 가요계의 중진이었던 김용환(金龍煥, 1909∼1949), 바로 밑의 아우는 ‘눈물 젖은 두만강’의 가수 김정구(金貞九, 1916∼1998), 막내가 피아니스트 김정현(金貞賢, 1920∼1987)이었습니다. 여기다 김안라의 올케언니, 즉 김용환의 아내는 가수 정재덕(鄭載德)이었으니 그야말로 온 식구가 음악 가족이라 할 만했습니다. 

김안라는 원산에서 광명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진성여학교를 다녔습니다. 1930년 1월 28일 아침, 김안라의 나이 16세 때 원산의 공사립학교 재학생들이 일제히 만세시위운동을 계획하다가 경찰에 검거된 사건이 중외일보 기사로 보도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원산 진성여학교 생도의 주동자가 바로 김안라였는데 필시 가수 김안라와 동일 인물로 보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그해 4월, 안라를 일본 도쿄로 서둘러 유학 보냈습니다. 김안라는 여러 학교를 전전하다가 도쿄의 중앙음악학교로 옮겼습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식당일도 했고, 또 무대에서 조선유행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 무렵 김안라의 음악적 재능을 알게 된 시에론레코드사에서 취입제의가 들어왔고, 여기에 응해 ‘낙화’, ‘월하(月下)의 유선(遊船)’ 등 두 곡을 불러 음반으로 발매합니다. 이것이 1932년, 음악학교 재학시절에 나온 가수 김안라의 첫 데뷔앨범입니다. 비록 유행가로 음반을 내긴 했지만 그녀의 가슴속에는 언제나 예술성과 대중성이 서로 갈등하고 있었으며, 장차 훌륭한 최고 소프라노 가수가 되고자 하는 꿈이 있었습니다. 

시에론 음반이 호평을 받게 되자 이번에는 포리도루레코드사에서 취입제의가 들어왔습니다. 포리도루레코드사와는 전속계약을 맺고, 여러 곡을 불러 음반으로 발매했습니다. 1934년 8월, 한반도 남쪽 지역 일대에 막대한 태풍피해가 발생했습니다. 도합 787명이 죽고, 침수 붕괴된 가옥이 3만4380채나 되었습니다. 김안라는 일본에서 열린 남조선 수해구제 구원공연에 출연하여 수익금을 수재민 동포들에게 보낼 만큼 사랑스러운 행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안라의 아름다운 활동은 여기까지입니다. 

1940년이 저물어가던 이 시점부터 일본 군국주의 체제와 이념을 위한 적극적 협력의 자세로 변신을 하는 광경이 보입니다. 그녀는 11월 초순, 중국 북만주지역 주둔 일본군 위문을 위해 약 1개월 일정으로 하얼빈 일대를 향해서 경성역을 떠납니다. 아마도 이런 무대에서는 고정 레퍼토리로 ‘종군간호부의 노래’(김억 작사, 이면상 작곡)를 비롯해 당시 조선총독부가 주도해서 만들었던 여러 군국가요와 일본 군가들을 열창했을 것입니다. 

대포는 쾅 우뢰로 튀고/ 총알을 탕 빗발로 난다/ 흰 옷 입은 이 몸은 붉은 십자의/ 자애(慈愛)의 피가 뛰는 간호부로다/ 전화(戰禍)에 흐트러진 엉성한 들꽃/ 바람에 헤뜩헤뜩 넘노는 벌판/ 야전병원 천막에 해가 넘으면/ 삭북천리(朔北千里) 낯선 곳 버레가 우네

-‘종군간호부의 노래’ 1절

작곡가 이면상이 행진곡풍으로 곡조를 붙이고, 시인 김억이 가사를 붙였는데 일본 군가라든가 군국가요의 전형적인 특성과 분위기를 그대로 연상케 합니다. 곡조는 음산하고, 전쟁의 패배를 느끼게 하는 우울한 그림자가 실감이 되는 노래를 김안라는 열창을 하고 있습니다. 천재시인 김소월을 문단에 발굴했던 안서 김억 시인이 일제 말 이런 가사를 썼다니 그것도 참 뜻밖입니다. 김안라 또한 소프라노 가수로서 왜 하필이면 이런 방향으로 급격히 삶의 경로를 바꾸었을까요? 문제는 그것이 자발적 선택과 동원이었다는 점에 있습니다. 1945년 일본이 항복하던 바로 그 해에도 김안라는 2월 중순 중국의 서주(西州) 지역으로 가서 오로지 일본군 위문 공연을 위해 약 6개월 예정으로 순회공연 길을 떠납니다. 일정만으로 보면 일본의 패전과 항복도 중국공연 중에 듣고 황급히 서울로 길을 재촉해 돌아왔을 듯합니다.

양악 가수든 대중가수든 장르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었겠지만 다만 한 성악가수가 대중가수로 변신해서 활동하며 시대의 조류에 무작정 편승하는 기회주의적 삶과 처신은 몹시 잘못된 선택이라 하겠습니다. 한 인간의 삶과 발자취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절대 지워지지 않은 채 후대사람들에게 고스란히 남겨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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