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성인식 없어진 사회, ‘어른식’ 치르면 어떨까
[백세시대 / 금요칼럼] 성인식 없어진 사회, ‘어른식’ 치르면 어떨까
  • 이호선 숭실사이버대 기독교상담복지학과 교수
  • 승인 2019.07.26 13:34
  • 호수 68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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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결혼하면 어른이라 했는데

지금은 다들 어른 되기 싫어해

어른은 이제 노인 몫으로 남아

좋은 노인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성대한 기념식 만들어 줘야

저절로 되었으면 좋겠다, 어른 노릇! 나이 먹으니 나잇값을 하란다. 세월이 지나며 지불한 것은 청춘이요, 남은 것은 주름인데, 어디 훈장 하나 없이 자격 하나 없이 살아온 세월에 숨돌릴 겨를도 없이 늙어왔는데 이제 ‘어른’이 숙제로 남았다.

‘늙은이’는 저절로 되는 것이나, ‘어른’은 쉽질 않다. 우리 안에 ‘어른 됨’에 대한 기준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어찌 ‘어른’으로 살아야 하는지 학교에서도 배운 바 없다. 다 같이 밥을 먹은 후 아무리 둘러봐도 밥값 낼 사람이 나뿐이라면 저절로 어른인가? 주변을 두루 살펴 내가 나이가 제일 많으면 어른인가? 키가 자라고 힘이 세어지면 어른인가? 18세 이상의 미성년자를 벗어나면 어른인가? 이제 우리는 크다 못해 늙고, 늙다 못해 삭고 있는데, 이 시점에 도대체 뭐가 있으면 어른일까?

과거에야 관혼상제(冠婚喪祭) 중 관(冠)을 통한 출세와 혼(婚)을 통해 가장의 자리에 이르러 상투를 틀고 비녀를 꽂으면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했다. 이제는 다들 어른 되기를 힘들어하고 싫어하다 보니 시대의 발길질 끝에 어른은 노인의 몫으로 남았다. ‘나잇값’ 운운하는 건 노인들에게 하는 소리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그러나 관(冠)은 고사하고 관(棺)에 들어갈 일만 남고, 혼(婚)은 고사하고 혼(魂)이 나가게 생겼는데, 이제 와 우리에게 어른 노릇 하라니 참 난감하다.

인공관절, 인조인간으로 살게 될 트랜스 휴먼 시대에 우리는 더 살아야 하고, 이 사회가 우리를 살게 하는 데에는 우리의 역할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죽지 않는 시대, 노인에게 맡겨지고 남겨진 ‘어른’은 젊은이들 들어오면 ‘얼른’ 자리를 비켜주는 눈치와 눈이 안 보여 ‘어른’대는 노화, 그리고 울먹이는 세대를 ‘어르는’ 심정을 가진 자가 아닐까?

세대를 읽는 힘은 단순한 ‘눈치’만은 아닐 것이다. 눈치가 온 감각의 합을 통한 자기보호 개념이라면, 자리를 내어주는 그 몸짓은 ‘배려’의 감각이라 할 것이다. 누구나 더 많은 것을 갖고 싶고 그것을 유지하고 싶지만, 배려는 이 모든 이기적 특성을 ‘다음’으로 넘긴다. 

어두워진 눈으로 부리부리 박사의 돋보기안경처럼 빙글 도는 안경을 쓰고 깨알 글씨 속에 교훈을 먹고, 돌봄의 젖을 내어 먹이며, 육신의 눈은 멀어가나 시대를 읽고 감각적인 역사적 시선으로 다음 세대에게 부드러운 눈길을 주는 감각적 심정 돋보기를 가진 이, 그가 어른이다.

귀는 안 들려도 토하듯 아파하고 자해하며 제 팔을 긁어대는 처절한 청년들의 울먹임을 듣고, 주름진 팔로 기꺼이 청년의 허리를 감싸 안는 주인공, 꿀떡꿀떡 넘어가는 그 콧물 울음에 아무 말 없이 등을 쓸어주는 자, 그가 어른이다.

가진 것이라고는 눈치, 남은 것이라고는 어두운 눈, 볼륨을 잔뜩 올려야 간신히 듣는 귀밖에는 없으나, 이게 우리가 세상을 꿰뚫는 관(貫)이다. 관직을 내려놓고 관(棺)에 들어갈 생각을 해본 자라야 세상을 꿰뚫어 그 한가운데에 설 수 있다. 세대를 끌어안고 관대함으로 괜찮다 말해주는 할아버지 할머니 심정이어야 세대를 묶는 세대 혼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늙음을 말하는 이는 늙음으로 인간을 보고, 심정과 성정을 말하는 이는 온도로 사람을 본다. 식어가는 몸으로 세대를 가장 뜨겁게 안을 수 있다면 그게 어른이다. 

성인식이 없어진 사회가 아쉽다. 성대한 형식이 관(冠)과 혼(婚)으로 사람을 성인이 되게 하는 것이라면, 이제 100세를 넘어 사는 지금에 노인에게 어른의 역할이 주어졌다면 이제 노인들에게 ‘어른식’을 제안한다. 좋은 노인으로 살아가도록 해놓은 사회적 장치들이 사라졌다. 천지가 한 바퀴 돌아 새로이 세상을 보는 환갑잔치를 요즘 누가 하나, 공자가 말한 70세 마음을 따라 살아도 된다는 ‘종심(從心)’도 종쳤다. 이제 노인이 어른 되게 ‘어른식’을 만들자. 성대한 어른식을 통해 가장 오래 산 사람들에게 사회적 돌봄자의 이름표를 붙여주자. 

호칭은 관계와 역할을 규정한다. 노인의 ‘어른식’은 노인이 사회의 어른임을, 그리고 노인이 사회 어른의 역할을 해야 함을 알려주는 중요한 과정이 될 것이다. 100살 그 임종의 나이가 아니라, 아직 건강한 70세쯤 ‘어른식’을 치르면 어떨까? 광화문에서는 노인들의 집단 어른식이, 이 의례가 있었다는 뉴스가 헤드라인이 되게 하면 어떨까? 그래야 우리가 바로 ‘어르신’이 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바로 ‘어른’의 냄새를 피울 것이다. 누가 안 해주면 우리끼리 치르자! 노인의 날에 ‘어른식’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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