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가요황제’ 남인수
[백세시대 / 금요칼럼] ‘가요황제’ 남인수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9.08.02 14:12
  • 호수 6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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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쩍새의 흐느낌처럼

거의 절규에 가까운 음색으로

가슴을 울렸던 가수 남인수

그의 3옥타브 넘나드는 미성은

절망에 빠진 민중 쓰다듬어

우는 소리가 마치 피를 토하듯 처절한 느낌으로 들린다고 해서 자규(子規)란 이름으로 불리던 새가 있었지요. 자규는 두견새, 접동새란 이름으로도 불리던 소쩍새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옛 선비들은 멸망한 왕조의 슬픔을 이렇게 새 울음소리에 견주어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국의 근대 가수들 가운데서 두견새의 흐느낌처럼 거의 절규와 통곡에 가까운 음색으로 노래를 불렀던 가수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험난했던 시기인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온몸으로 역사의 눈보라를 고스란히 맞으며 그 고난의 시기를 피눈물로 절규했던 가수 남인수(南仁樹, 1918~1962)가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한국 대중음악사를 통틀어 유일하게 팬들에 의해 ‘가요황제’로 추앙되고, 그 전설적 명성이 높이 일컬어졌던 가수 남인수는 원래 진주가 아니라 경남 하동에서 출생했습니다. 첫 이름은 최창수(崔昌洙)였으나 부친 사망 후 개가한 어머니를 따라 진주의 강씨 문중으로 들어가 호적 명이 강문수(姜文秀)로 바뀐 것이라고 합니다. 

경남 진주는 가수 남인수의 제2의 고향이자 성장지였습니다. 이 지역은 이미 대중예술가 김영환(김서정), 손목인, 이재호, 이봉조 등을 비롯하여 예능 방면에서 활동하는 다수의 명인들이 배출된 곳이기도 합니다. 

남인수 최고의 대표곡 '애수의 소야곡'은 발표되자마자 엄청난 인기를 얻어서 남인수는 곧장 최고 가수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른바 공전(空轉)의 대히트였지요. 음반은 줄곧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고, 음반 판매점에서는 가게 앞에 유성기를 내다 놓은 채 달콤하면서도 애절한 음색으로 불러 넘기는 남인수의 기막힌 그 노래를 날마다 연속으로 틀고 또 틀었습니다. 이미 매진된 이 레코드를 구하기 위해 레코드 회사 앞 여관에는 전국에서 모여든 레코드 상인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당시 언론들은 남인수의 목소리를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요황제 탄생’이라고 연일 보도하며 가수 남인수의 출현에 대한 찬탄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수년 전 제가 이끌고 있는 전국적 규모의 옛가요사랑모임 '유정천리'에서는 도합 12장의 CD로 제작한 가요황제 남인수의 전집을 발간해서 장안에 놀라운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무려 270곡이 넘는 남인수의 지금까지 확인된 모든 노래들이 전집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조용한 시간, 한 곡 한 곡 들을 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는 애잔함이 사무칩니다.

그는 가요뿐만 아니라 음악의 전 영역을 통틀어 유일하게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순수한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잡음이 배제된 단일한 대역(帶域)에서 순수한 소리를 뿜어내는 그의 미성은 저음과 고음을 넘나드는 자유를 맘껏 발산하고 있습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면 자신감으로 충만한 여유와 생에 대한 진정으로 몸을 떨게 되는데, 아마도 3옥타브를 넘나드는 음역에서 뿜어내는 자유로운 성음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그의 성음과 관련하여 풍부한 성량을 자랑하는 정통 성악가들도 그와 함께 무대에 서길 꺼려했다는 말이 전해집니다. 고음에서는 쇳소리가 울리듯 쟁쟁하고 날카롭게 듣는 이의 폐부를 파고 드는가 하면, 저음에서는 속삭이듯 흐느끼듯 하면서 부드러움과 감미로움을 안겨주는 매혹적인 미성(美聲), 폭발적이고 정열적이며 순발력이 뛰어난 창법, 무려 세 옥타브까지 거침없이 넘나드는 자유자재한 발성 능력, 정확한 가사 전달력(발음) 등은 거의 완벽성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됩니다. 절망과 실의에 빠졌거나 현실생활에 지친 민중에게 활력을 실어 주는 마력을 발휘함으로써, 일제강점기부터 그의 인기는 거의 절대적이었다는 말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가요황제 남인수의 노래가 우리 가슴에 가장 절절하게 사무치도록 다가오는 시간은 우리네 삶이 어딘가에 시달려 심신이 몹시 피로하거나 곤비한 시간입니다. 아니면 고달픈 나그네 길에서 돌아오는 경우라도 잘 어울립니다. 이러한 저녁 시간, 버스나 기차의 붐비는 공간이라면 더욱 좋습니다. 바로 그때 성능이 시원치 않은 스피커에서 뿌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뒤섞여 들려오는 정겹고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있습니다. 자세히 귀 기울여 들어보면 그것은 틀림없이 남인수의 노래이지요. 이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남인수의 노래는 대개 유랑과 향수, 청춘의 애틋한 사랑과 과거의 회상, 인생의 애달픔 따위를 담고 있습니다.

민족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노래 한 가지로 민족의 고통을 쓰다듬고 위로해 주었던 가수 남인수! 그의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기란 어려운 일이나 우울하고 암담한 시간의 저 밑바닥 심연에 가라앉아서도 결코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한 인간의 다부지고 결연한 목소리. 단단하지만 딱딱하지 않고, 카랑카랑하지만 애수와 정감으로 둘러싸인 목소리. 바로 그것이 남인수 성음의 핵심이 아닐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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