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아끼다 똥 된다구요”
[백세시대 / 금요칼럼] “아끼다 똥 된다구요”
  • 신은경 차의과대학 교수
  • 승인 2019.08.16 13:51
  • 호수 68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짬이 나 부엌‧책방 등 정리하려니

그냥 버리긴 아깝고

당장 쓸 수도 없는 물건 많아

소중한 것은 아낌없이 써야지

안 그러면 정리하다 시간만 낭비

여름 방학이 되어 모처럼 시간이 났다. 평소 버리고 싶던 물건들을 정리할 용기를 내어 보았다. 숨 가쁘게 바쁜 날들엔 쉽게 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인쇄물들과 메모지들을 모아 이곳저곳 쌓아 두었던 더미를 하나씩 꺼냈다. 들추어 본지 아주 오래되었는데 다시 보니 또 소중해서 버릴 수가 없다. 그렇게 소중한데 왜 오랫동안 쳐다보지 않았던 건지. 그런가 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을 꾸러미 쌓아놓은 것도 있다.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되어 버리지 못했던 것들이다. 이젠 버릴 수 있다.

부엌살림은 좀 더 심각하다. 삶에 꼭 필요한 기구라 생각해 장만했던 것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방치되어 있다. 기름 짜는 기계. 신선하고 건강한 기름을 먹겠다고 구입해 놓았는데 아직 한 번도 사용해 본 적이 없다. 그 옆에 얼음제조기. 작년에 하도 빙수를 사 먹어 차라리 집에서 만들어 먹겠다고 장만했던 건데, 이번 여름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빨리 넘겨야겠다. 요즘 유행하는 에어 프라이어라는 것과 새로운 전기압력밥솥을 사려던 계획은 없던 거로 하기로 했다. 프라이팬은 달걀 부침하는 작은 것 하나만 남기도 다 버린 이후로 새로 사는 걸 망설이고 있었는데 아주 잘한 것 같다.

책방도 손 볼 데가 많다. 이사할 때마다 내가 한 가지 사치를 부리는 곳이 바로 여기다. 남편에게 핀잔을 들어가며 방 하나의 삼면을 천장까지 닿는 책꽂이를 짜 넣은 것이다. 그때는 공간이 넉넉했는데 또 더 이상 꽂을 곳이 없을 만큼 빽빽해졌다. 한 칸에서 한 권씩 빼내 버리겠다고 정리를 시작했지만 두 줄을 못 가 포기하고 만다. 책 앞에선 제일 마음이 약해진다.

언젠가 한 여성이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그 분 흉을 보는 걸 들은 적이 있다. 화장품이며 치약 샴푸 같은 생활용품이며, 좋은 스카프, 장신구까지, 남기신 물건이 구석구석에서 얼마나 많이 나오던지 그걸 치우느라 끔찍했다고 불평하는 소리였다. 

버리려다가 또 아까워 다시 넣어두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돌아본다. 살 빠지면 입으려고 남겨두었던 옷, 집에서 허드레로 입으려고 쌓아둔 옷, 언젠가는 꼭 읽어야 할 것 같고 내 딸에게 읽히고 싶어 책꽂이가 미어지도록 쌓아놓은 책들. 요즘은 플레이어도 없어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된 음반들. 처분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용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런 스스로에게 협박하듯 속엣말을 한다. ‘너, 내일 떠난대도 정리 안 할래?’

그래, 나 떠난 뒤 내 물건을 정리하게 되는 사람 고생시키지 말아야지. 흉잡히지 않도록 정리해 놓고 살아야지.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려고 <인문학 따라 쓰기>라는 필사용 책을 꺼냈다. 바쁘게 사는 동안엔 감히 생각도 못 했을 시도이다. 

필사엔 우선 좋은 필기구가 필요하다. 격을 높이려고 만년필을 꺼냈다. 그동안 아끼다가 오랜만에 꺼냈더니 잉크가 말랐다. 급한 마음에 펜촉에 잉크를 찍듯이 직접 잉크를 찍어 글씨를 써보았다. 농도가 조절이 안 되어 글씨가 너무 진하고 두꺼워 뒷면까지 배어 나왔다. 만년필이란 자주 사용해 주인의 손놀림에 길이 잘 들어야 하는데 고이 모셔두다 보니 제 기능을 잊어버린 것 같다.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책망하는 마음이 들어 노란 메모지 한 장을 꺼내 격문을 써 붙였다. <아끼다 똥 된다>.

팔을 걷어붙이고 정리를 시작한 오늘, 정리보다 더 중요한 걸 깨달았다. 소중한 것은 아끼지 말고 잘 써야겠다는 것이다. 책도 그릇도 옷도.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 나눔, 세상의 귀한 이치와 진리이다. 알고도 누리지 못하고 엉뚱한데 시간과 생각을 낭비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는지 돌아볼 일이다.

많이 가진 사람은 물론 행복할 것이다. 부족한 것보다는 풍족한 것이 좋고 아쉬운 것보다는 여유 있는 것이 좋다. 그러나 가지기만 한들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가지는 것과 누리는 것은 다르다.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그걸 누리고 즐기지 못하면 없느니만 못하다. 너무 많아 다 사용할 기회가 없다면 꼭 쓸 만큼 가진 것보다 행복하지 못하다. 있는 것 정리하다 시간을 다 버리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아야겠다. 아끼다 똥 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