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업적 부각되는 일제시대 애국지사…전 재산 팔아 신흥무관학교 등 세운 이석영 선생
숨은 업적 부각되는 일제시대 애국지사…전 재산 팔아 신흥무관학교 등 세운 이석영 선생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8.16 14:26
  • 호수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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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준 선생, 경주 최부잣집 상속자… 땅 담보 대출로 임시정부 운영비 대
김용환 선생, 노름꾼으로 위장해 종갓집 전 재산 독립운동에 후원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영화 ‘봉오동 전투’의 한 장면,

[백세시대=배성호기자]개봉 일주일 만에 200만명을 돌파하며 순항 중인 영화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를 비롯한 독립군의 이야기를 다뤄 큰 감동을 선사했다. 영화에 등장하는 독립군들은 1911년 중국 서간도에 세워진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다. 우당 이회영과 이동녕, 장유순 등이 주축이 돼 만든 신흥강습소에서 시작된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까지 김원봉·김산 등 독립군 간부와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하며 국외 무장독립투쟁의 본거지가 됐다. 

신흥무관학교를 이야기 할 때 반드시 거론돼야 하지만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이가 있다. 바로 우당 이회영의 둘째 형이면서, 전 재산을 내놓은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1855~1934)이다. 실제로 우당 가문이 독립운동자금으로 내놓은 돈의 거의 대부분이 그의 것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우들이 전면에서 활동했다면 이석영 선생은 묵묵히 뒤에서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자료가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다.

이석영 선생의 가문은 조선 왕조의 명신 백사 이항복을 비롯해 8대에 걸쳐 판서를 배출한 최고의 명문가였다. 또 그는 고종 때 함경도 관찰사를 거쳐 좌우정과 영의정을 지낸 이유원의 양자로 들어가 그의 전 재산을 상속받았다. 이유원은 청국을 수차례 오가는 등 요직을 두루 거쳐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황현이 쓴 구한말 비사 ‘매천야록’에 따르면 이유원은 양주(현 경기 남양주 화도읍)에 있는 별장에서 서울 명동에 있는 집으로 올 때 자기 땅만 밟고 올 수 있었다고 할 정도로 구한말 최고의 재력가 중 하나였다.

이석영 선생은 한일합방 후 만주로 이주할 때 물려받은 이 재산을 처분해 독립자금으로 후원했다. 이석영 선생과 그의 형제들이 마련한 돈은 당시 돈으로 약 40만원이었다. 광복 후인 1969년 월간 ‘신동아’에서 당시  쌀 시세로 환산해 계산해 본 결과 600억원에 달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이를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조5000억원이 넘는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물심양면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이석영 선생은 끝내 광복의 순간을 맞이하지 못했다. 특히 1934년 이국땅인 중국에서 두부 비지로 연명하다 아사(餓死)했다는 사실은 절로 숙연해지게 만든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늦게나마 이석영 선생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고 연고가 있던 남양주시에서도 그의 독립운동을 다룬 뮤지컬을 만드는 등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점이다. 

독립군 자금 대려 백산무역 설립

독립운동가 안희제를 도와 백산무역주식회사를 만들고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조달한 최준 선생(1884~1970) 역시 최근 관련 사료가 발견되면서 재조명받고 있다. 매년 곡식을 만 섬 이상 거둔다는 만석꾼을 12대에 걸쳐 배출한 경주 최부잣집의 마지막 최부자였던 최준 선생은 일찍이 대한광복회 재무부장과 조선국권회복단 경주 대표 역을 맡아 독립군 자금줄 역할을 했다.

백산무역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초창기 운영자금의 6할을 감당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로 재정적으로 크게 기여한 독립운동 자금원이었다. 당시 독립운동 군자금을 지원하려면 논밭을 팔아야 하는데, 시간도 걸리고 일제에 탄로 나기 십상이었다. 그래서 만석 재산을 갖고 군자금을 만드는 방법으로 1919년 백산무역을 설립했다. 

논밭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이 자금을 수출입용으로 위장한 뒤 백산무역을 통해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하지만 계속된 지원으로 백산무역이 부실화하고 독립운동계와 일반 대주주 사이에 분규가 일어나자, 사장 최준은 이를 수습하기 위해 개인 재산을 담보로 조선식산은행으로부터 35만 원이란 거액을 대출하게 된다. 지난해 발견된 근저당설정계약서를 보면 담보로 제공한 부동산은 경주의 710여 건과 울산의 62건 전답 66만 평으로 여의도 면적의 4분의 3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이다. 

최 준 선생의 조선식산은행 근저당계약서.
최 준 선생의 조선식산은행 근저당계약서.

독립운동 자금지원으로 백산무역주식회사가 130만원이란 막대한 규모의 부도를 내고 결국 파산하게 되자, 무한책임을 진 최준은 전답은 물론 가구까지 압류당하는 수모를 겪게 되며, 마지막에는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관리를 조선신탁주식회사에 이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부동산관리신탁계약서에 따라 최부자는 해방이 될 때까지 재산권 행사를 하지 못하고 조선총독부의 통제와 감시 아래 놓이게 된다.

생존시 ‘파락호’라는 비난 받아

파락호(破落戶)란 오명을 쓰면서도 독립운동을 지원했던 김용환 선생(1887∼1946)도 최근 재평가를 받고 있다. 파락호란 재산이나 권력이 있는 집안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말한다. 지난해 방영돼 큰 인기를 끈 ‘미스터 션샤인’ 속 어설픈 독립운동가 김희성이 김용환 선생을 모티브로 해 화제를 모은 바 있다.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영남 남인의 시조이며 임진왜란에도 참전한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인 김용환 선생은 노름 때문에 안동에서 이름을 날리며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종갓집과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원에 달하는 재산을 모두 탕진했다. 도박에 빠져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모르고 땅 700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기도 했다. 

김용환 선생은 안동의 모든 노름판을 전전하며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판돈을 걸었다. 사당 신주까지 팔아치우려는 것을 문중 사람들이 뜯어말리기도 여러 차례였다. 그것도 모자라 시집 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시댁에서 받은 돈마저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하며 희대의 파락호라는 손가락질을 당했다.

그러던 김용환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났는데 그가 세상을 등지고서야 그간 노름빚으로 탕진했다고 믿었던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낸 사실이 알려졌으며 파락호 행세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한 철저한 위장술이었음이 늦게나마 밝혔졌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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