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100세 철학자의 ‘재능나눔’ 유감
[백세시대 / 세상읽기] 100세 철학자의 ‘재능나눔’ 유감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08.23 13:46
  • 호수 6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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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전 겨울 어느 날, 김남조(92) 여류시인이 기자에게 “100세 가까운 연세의 김형석 교수님이 강연도 다니시고 건강하다는데 그런 분을 ‘백세시대’ 신문에 소개하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귀가 번쩍 뜨였다. 김형석(99) 연세대 명예교수는 개인적으로 잘 알지는 못했지만 과거 학계에서 유명했던 분이라 이름 정도는 알고 있었다. ‘100세 현역’은 노인신문으로선 최상의 기사감이다. 장수 비결서부터 죽음에 대한 성찰 등 들어볼 이야기가 많아서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로 인터뷰 요청을 하자 그 자리에서 ‘좋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대여대 정문 앞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 교수는 중절모에 곤색 외투를 입고 약속 시간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백세 어르신을 기다리게 해 죄송스런 마음이 들었다. 2시간 가까이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시종일관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기자의 질문을 받고 재차 물어보는 일도 없었다.   

이날 ‘몇 살까지 살기를 원하시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정신적으로 성장하고 다른 사람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까지 사는 것이 좋다”고 대답했다. 이어 ‘어떤 삶을 살고 싶으신가’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길게 대답했다.

“요한 바오로 2세가 남긴 유언이 ‘나는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도 행복하십시오’에요. 그 말이 참 인상 깊어요. 종교인들은 내세가 있고 천당이 있다고들 하지만 그건 내가 어떻게 해서 되는 게 아니고 목사가 설교를 했다고 해서 갈 수 있는 것도 아니지요.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 많은 이에게 도움을 주고 그것이 끝난다면 최선의 인생이 아닌가 합니다. 변종하 화백(1926~ 2000)이 말년에 뇌경색으로 몸을 못 쓰게 되자 의자에 몸을 묶고 그림을 그렸어요. 마지막까지 그림으로 주고 가려는 마음, 나도 그렇게 죽음을 맞고 싶어요.”

한 달에 수차례 전국 강연을 다니는 왕성한 기력이 가능한 건 이런 소망에서 비롯된 듯하다. 특히 청소년 대상의 강연은 될 수 있는 한 응하려고 한다. 김 교수는 “고등학생 강연에 와 달라고 하면 지방일지라도 거의 사양하지 않고 간다”며 “크리스천으로서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평양숭실중학교 3학년 때 중퇴한 뒤 1년 간 날마다 자전거를 타고 시립도서관에서 톨스토이, 빅토르 위고 등 세계문학을 읽었던 시간들이 오늘날의 나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김형석 교수의 인터뷰가 백세시대 신문에 게재되자 즉각 반응이 나타났다. 방송국과 신문사에서 김 교수를 만나고 싶다며 연락처를 물어왔다. 속된 말로 백세시대 신문에 소개된 이후로 김 교수는 ‘떴다’. 이후로 매스컴에서 그를 보면 좋은 소스(?)를 귀띔해준 여류시인의 혜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다.

김 교수를 다시 보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지난 어느 날, 퇴근길 버스 안에서였다. 그는 서대문구 연희동 2층집에서 혼자 지낸다. 기자는 뒤에 앉아 앞자리에 앉은 김 교수의 행동을 유심히 살폈다. 그는 버스가 정류장에 닿기 직전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앞 손잡이를 잡았다. 버스의 요동에도 흔들리지 않은 채 허리를 곧게 펴고 우아하게 서 있었다. 백세 노인의 나약함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가 멈추자 천천히 차에서 내려 횡단보도 앞에서 젊은이들 속에 섞여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에 지인으로부터 ‘인기몰이를 하는 김 교수의 글을 백세시대 신문에 게재하면 좋을 것 같다’는 반가운 제안을 받았다. 그에게 전화를 걸어 ‘선생의 저서 중에 노인에게 유익한 글을 발췌해 게재하고 싶다, 원고료 문제는 재능나눔 차원에서 양해해 달라’고 조심스럽게 부탁했다. 그러자 “출판사와 상의할 문제도 있고…어렵다”며 거절했다. 출판사들도 그를 내세우면 장사가 된다는 걸 알고 있다. 올해만도 ‘100세 철학자의 인생, 희망이야기’(5월), ‘100세 철학자의 철학, 사랑 이야기’(8월) 등이 서점에 나왔다. 이 책들은 연세대 철학과 교수 시절 고교생과 대학 1~2학년들을 대상으로 쓴 글들 가운데 지금도 유효한 이야기들을 가려 묶은 것이다. 

그의 ‘묶은 책’을 접할 때마다 미안한 듯 사양했던 그의 음성과 함께 인생 고뇌와 철학적 관조가 담긴 글을 받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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