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문화유산 시리즈 1] 종묘, 조선 역대 왕‧왕비 봉안한 사당… 국내 최장 목조건물
[유네스코 문화유산 시리즈 1] 종묘, 조선 역대 왕‧왕비 봉안한 사당… 국내 최장 목조건물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8.23 14:12
  • 호수 6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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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부터 순종까지 19위 모신 ‘정전’은 단조롭지만 엄숙한 조형미
단종, 사도세자 등은 ‘영녕전’에 봉안… 공신당엔 율곡 등 83위 신주
종묘의 정전. 건물 앞에 있는 가로 109m, 세로 69m나 되는 넓은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잘 나타낸다. 월대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아 정중하게 걸어다니도록 했고 가운데로는 신들이 다니는 길인 신로가 나 있는 것도 특징이다. 정전의 오른쪽에는 왕과 제관들이 드나든 동문이 왼쪽에는 무희와 악공이 오가는 서문이 위치한다.
종묘의 정전. 건물 앞에 있는 가로 109m, 세로 69m나 되는 넓은 월대는 정전의 품위와 장중함을 잘 나타낸다. 월대에는 얇고 넓적한 박석을 깔아 정중하게 걸어다니도록 했고 가운데로는 신들이 다니는 길인 신로가 나 있는 것도 특징이다. 정전의 오른쪽에는 왕과 제관들이 드나든 동문이 왼쪽에는 무희와 악공이 오가는 서문이 위치한다.

[백세시대=배성호기자]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새로운 수도 한양으로 옮길 때 가장 먼저 건설한 곳. 동양의 파르테논 신전이라 불리는 곳. 사극에 자주 등장하는 “종사가 위태롭사옵니다!”에서 ‘종’이 의미하는 곳, 바로 종묘다. 현재는 ‘서울 종로구 종로 157’에 위치한 종묘는 태조부터 순종까지 이어졌던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사당이다.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조선시대에는 지금의 정전을 종묘라 하였으나, 현재는 정전(국보 제227호)과 영녕전(보물 제821호)을 모두 합쳐 종묘라 부른다. 

종묘는 태조 4년인 1395년 9월에 완공됐다. 태조는 한양에 신실(신의 위패를 모셔놓고 제사를 올리는 방) 7칸에 좌우 익실 2칸이 달린 정전과 공신당 등의 건물이 세워지자 개성에 있던 태조의 4대조로 추존왕(사후에 추대된 왕으로 조선에만 9명)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의 신주를 옮겼다.

그러다 세종조에 오자 7칸이 다 차 막상 자신이 죽으면 들어갈 곳이 없게 됐다. 세종에게 주어진 방법은 두 가지였다. 정전을 확장하던가 아니면 별도의 건물을 짓는 것이다. 결국 세종은 정전 서쪽에 영녕전을 신축해 추존왕 4대의 신위를 옮겼다. 건물의 이름인 ‘영녕(永寧)’은 ‘조상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처음에 영녕전은 중앙 4칸에 좌우로 익실 각 1칸을 더한 형태였다.

종묘는 13대 명종조에 이르러 다시 한계에 부딪힌다. 정전과 영녕전 모두 선왕들의 신위로 꽉 찼기 때문이다. 결국 정전의 태실은 4칸을 증축해 총 11칸이 된다. 이때 무한정 신실을 늘릴 수만은 없다는 여론이 일면서 다음과 같은 봉안의 원칙이 세워졌다. 

‘5대가 지난 왕은 원칙적으로 정전에서 영녕전으로 신위를 모셔 봉안한다. 그러나 태종이나 세종과 같이 공덕이 뛰어난 선왕의 위패는 옮기지 않고 영구히 정전에 봉안한다. 덕종이나 장조와 같이 실제 보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세자들도 추존왕으로서 영녕전에 봉안한다. 그리고 정전 내 가장 서쪽으로부터 선왕의 순으로 신위를 모신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제도가 정착됐을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의주로 피난을 간 선조는 종묘의 신위를 함께 옮겼으며 전란에 종묘가 불에 타서 사라지자 제일 먼저 재건축을 지시했다. 하지만 종묘가 갖고 있는 건물의 비중 때문에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야 완성됐다. 헌종 2년(1834)에는 정전의 신실 4칸을 늘리고 영녕전 협실 4칸을 증축했다. 이것으로 현재 전해지는 종묘의 모습이 완성된다. 현재 19실에 태조, 세종 등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있다. 

길게 늘어선 정전의 판문(板門). 자세히 보면 X자 형태로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환기 등 기능성과 혼령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길게 늘어선 정전의 판문(板門). 자세히 보면 X자 형태로 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환기 등 기능성과 혼령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또 영녕전에는 태조 이성계의 4대조와 사도세자를 비롯한 추존왕 9명과 단종 등 재임기간이 짧고 업적이 미약한 왕 6명, 그리고 영친왕 등이 모셔졌다.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은 정전과 영녕전에서 모두 제외됐다.

정문인 외대문을 지나 10여분정도 걷다보면 종묘의 주된 건물인 정전을 만나게 된다. 정전으로 들어가는 문은 모두 세 개인데 동문과 남문, 서문이다. 남문은 조상신이 들어가는 문으로 신문이라고도 한다. 동문은 종묘제례 시 왕과 왕세자를 비롯한 제관들이 들어가는 문이며, 서쪽에 있는 서문은 악공과 춤을 추는 무희들이 출입하는 문이다. 

정전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목조건물이다. 단층으로 101m 길이의 20개의 기둥과 19칸의 문이 단조롭지만 엄숙하다. 정전의 각 신실은 제일 뒤에 신위를 모신 감실을 두고 그 앞에 제사지낼 공간을 마련했다. 단순한 구성을 한 신실이 모여 하나의 장대한 수평적인 건축 형태를 이룬 것이다.

영녕전은 정전의 서쪽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다. 시설과 공간 형식은 정전과 비슷하다. 단순하고 절제되면서도 웅장한 멋을 보여준다. 단 의도적으로 정전에 비해 건물의 규모를 비롯해 모든 면에서 한 단계 격이 낮게 설계됐다.

정전 건물 앞에는 얇은 돌을 쌓아 만든 월대가 있다. 종묘제례 의식을 치르기 위해 만든 마당이다. 월대를 구성하고 있는 돌은 거칠고 평탄치 않다. 이는 신성한 공간에서 경박스럽게 움직이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 지면이 평탄하지 않고 경사를 이룬 것은 비가 많이 내려도 고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한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종묘에는 공신당도 있다. 16칸짜리 공신당에는 모두 83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는데 이퇴계, 이율곡 등 잘 알려진 학자들의 신주도 포함되어 있다. 또 고려 31대 공민왕과 왕비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을 모신 신당도 자리하고 있다. 이밖에 종묘에는 제사에 사용할 제사 예물을 보관하고 헌관이 대기하던 장소인 향대청, 제사를 지내기 전에 왕과 세자가 머무르면서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갈아입던 어숙실(재궁), 제례 의식에 참석한 왕이 휴식을 취하던 망묘루 등이 있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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