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미국 노인, 한국 노인
[백세시대 / 금요칼럼] 미국 노인, 한국 노인
  • 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 승인 2019.08.30 14:04
  • 호수 6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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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을순 문화미래 이프 대표] 

미국 방문 중 한 마트에 가니

그레고리 펙, 오드리 헵번 닮은

시니어들이 점원으로 일해

한국도 노인일자리 많이 만들어

‘시간 죽이기’ 않도록 했으면

지난달,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한 마켓을 들렀다. 주택가 한가운데 위치한, 건물 외관도 깨끗하고 주차장도 잘 정리된 식품점이다. 사이즈는 이마트나 롯데마트만큼 대형은 아니지만, 중간크기쯤 될까.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눈이 마주치자 따뜻한 미소를 보내는 계산대의 한 직원.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다. 과일코너를 갔다. 하얀 장갑을 끼고 진열할 사과를 정성스레 닦고 있는, 나이 지긋한 한 남자의 모습. ‘앵무새 죽이기’ 같은 고전 영화에서 방금 튀어나온 것 같은 얼굴. 바로 ‘그레고리 펙’ 배우였다. 아니 ‘그레고리 펙’을 닮은 할아버지다. 

외국인들이 동양사람 얼굴 잘 구별 못 하듯이 내 눈엔 짝퉁이나 진짜 배우나 다 비슷비슷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이 가게 점원들은 온통 나이 지긋한 분들이다. 가지런히 탄산수병을 진열하고 있는, 눈웃음이 매력적인 ‘리차드 기어’ 닮은 할아버지. 생선코너에 하얀 가운을 입은 ‘댄젤 워싱턴’ 닮은 분까지. 

사과 고르는 법까지 코치해주며 직접 골라주시던 ‘그레고리 펙’을 뿌리치지 못해 좋아하지도 않는 사과를 한 봉지 가득 담아 왔고, 좋은 영화의 좋은 역만 맡아 좋은 인상을 받은 ‘댄젤 워싱턴’이 잘라주는 연어 한 토막까지 사서 집에 돌아왔다. 

이 마켓은 연세는 있으시나 (적어도 일흔은 넘으셨을 듯) 건강한 분들을 세일즈맨으로 고용하는가 보다. 저 나이에 저런 일을 저렇게 부끄럼 없이 당당하게 하시다니. 그 용기가 부럽고 참 멋졌다. 

일하시는 멋진 할머니들도 많다. 백화점 화장품 판매대 점원의 70~80%는 멋쟁이 할머니들이다. 짧은 머리를 한 할머니. 자글자글한 목주름을 가리기 위해 예쁜 스카프를 목에 두른 ‘오드리 헵번’을 닮은 그 할머니는 스카프를 팔고 있었고, 섹시함의 대명사였던 ‘소피아 로렌’을 닮은 할머니는 그 이미지에 어울리게 립스틱 담당이다. ‘오드리’가 목에 두른 스카프도 사고 ‘소피아’가 골라 준 ‘핫 핑크’ 립스틱도 샀다.

세일즈맨이란 뭐 하는 사람인가. 손님이 원하는 물건을 파는 사람이다. 그럼 좋은 세일즈맨이란? 물건을 많이 파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마켓의 과일코너 할아버지랑 연어 팔던 할아버지랑 또 스카프 파는 할머니랑 립스틱 파는 할머니까지. 모두 훌륭한 노인 세일즈맨들이다. 

시어서 잘 먹지도 않는 사과를 사고, 평소에 화장도 안 하는 여자가 립스틱에다 스카프까지 기분 좋게 사 온걸 보니, 노인들의 연륜이 묻어나는 조언이야말로 세일즈맨의 훌륭한 자산인 셈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멋지고 건강한 그 많고 많은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다 어디 계시나. 애들 결혼시켜서 한숨 돌릴 때쯤 자식들이 맡긴 손주육아를 다시 시작한 할머니. 온 동네 사우나 다니며 땀 빼고 달걀, 식혜 실컷 먹고 다시 땀 빼고를 반복하는 할머니. 공짜 지하철 타고 무작정 돌아다니며 시간 보내는 할머니. 공짜 지하철 타고 파고다 공원 가서 남의 장기 훈수나 두다가, 운 좋으면 막걸리 한잔 얻어 마시고 대낮부터 벌건 얼굴을 한 할아버지. 공짜 지하철 타고 산에 갔다 내려오는 길에 소주 한잔하고서는, 지하철에서 자리 양보 안 한다고 술 냄새 팍팍 풍기면서 학생에게 고함치는 할아버지. 

이 공짜 지하철이 문제다. 미국은 주마다 다르지만 65세 이상 노인에게 공짜 대신 차등 할인율을 적용하고 있고, 영국은 출퇴근 시간 외에만 무료 할인, 프랑스는 65세 하위계층에게만 출퇴근 시간외 50% 할인을 제공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언제 어디서든 무조건 공짜인 나라는 없다. 마켓에서 봉툿값 20원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봉투 사용이 줄었다 한다. 십 원짜리 동전이라도 막상 돈을 내라면 아까운 게다. 할인된 적은 돈이라도 노인들이 돈을 내야, 불필요한 외출도 좀 줄이고 지하철에 대한 책임감도 생기지 않을까.

65세 나이면 한창이다. 지하철 공짜로 안 탈 터이니 노인들도 일하게 해 달라. 젊은이들 직업을 뺏는다고? 요즘 간호사, 소방대원, 구급대원들이 모자라 과로로 순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일자리 없는 젊은이들 연수 교육 시켜 그곳으로 보충시키면 안 되려나.

한국 노인들이 공짜 지하철에서 술 냄새 풍기고 자리 양보하라고 고함치며 ‘시간 죽이기’ 하는 이 시간에도, 미국 노인들은 말끔하게 차려입고 출퇴근하며 마켓에서 사과도 닦아 진열하고, 백화점에서 물건도 팔면서 자기 삶을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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