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모레퍼시픽미술관 ‘바바라 크루거:포에버’ 전, 강렬한 문구와 이미지에 담은 ‘페미니즘’ 메시지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바바라 크루거:포에버’ 전, 강렬한 문구와 이미지에 담은 ‘페미니즘’ 메시지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9.06 14:02
  • 호수 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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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니스비엔날레 평생공로상 받은 현대미술 거장… 설치작 등 40여점
“당신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등 사진‧글자 오려 붙인 작품 인상적
이번 전시에선 ‘당신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등 강렬한 문구가 적힌 작품을 통해 페미니즘 미술의 거장 반열에 오른 바바라 크루거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사진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한 ‘무제(영원히)’의 모습.
이번 전시에선 ‘당신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 등 강렬한 문구가 적힌 작품을 통해 페미니즘 미술의 거장 반열에 오른 바바라 크루거의 대표작을 소개한다. 사진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한 ‘무제(영원히)’의 모습.

[백세시대=배성호기자]“충분하면 만족하라.”

지난 8월 30일 서울 용산구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입구에는 이와 같은 문구가 관람객을 맞고 있었다. 높이만 6미터에 달하는 판넬 8개에 한 글자씩 한글로 또박또박 쓴 ‘무제: 충분하면 만족하라’는 현재의 삶에 결핍을 느끼고 계속해서 무언가를 채우려고 갈망하는 현대인들을 향해 던지는 짧고도 강렬한 메시지였다. 이후에도 바바라 크루거(74)가 전하는 메시지는 시종일관 깊은 울림을 전했다.

세계적인 현대미술의 거장 바바라 크루거의 아시아 최초 개인전이 아모레퍼시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12월 29일까지 진행되는 ‘바바라 크루거: 포에버’ 전에서는 대형 설치, 영상 등 40여점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들여다본다.

바바라 크루거는 미국 출신 개념주의 작가로, 이미지와 글자를 함께 배치한 광고 형식의 작품들로 잘 알려져 있다. 젊은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의류브랜드 ‘슈프림’의 붉은 박스 로고에 영감을 준 작가로 유명하다.

상징적 서체와 간결하고 강렬한 메시지를 통해 동시대 사회의 메커니즘과 대중매체 속 권력, 욕망, 소비주의, 젠더, 계급 문제를 비판적으로 담아냈다. 작가의 작품은 보편적 관념이나 신념, 고정관념 등 사고의 근간을 이루는 생각의 틀에 의문을 제기하며 관람자가 주체적으로 생각하게 하는 작품을 발표해 거장의 반열에 올랐다. 2005년에는 세계최고의 미술축제인 제51회 베니스비엔날레에서 평생공로부문 황금사자상을 받기도 했다.

총 6개의 전시장과 아카이브룸으로 구성된 전시는 작가의 40여 년 간의 작업 세계를 총망라한다. ‘충분하면 만족하라’는 문구를 지나 전시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는 날카로운 수술 바늘이 눈을 찌르는 이미지에 ‘모욕하고 비난하라’(SHAME IT BLAME IT)라는 문구를 붙인 작품이 등장한다. 영화나 TV 등 미디어가 개인에게 가하는 시각적 위협을 표현한 작품이다. 사회 문제 중 하나인 몰카범죄 등 불법적인 촬영에 대한 심각성을 고민하게 한다. 실제로 작가는 카메라가 폭력적이라고 생각해 40여년간 기자회견을 거부해왔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큰 규모로 꾸려진 공간은 전시명의 모티프가 된 ‘무제(영원히)’이다. 아모레퍼시픽미술관의 소장품이자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기도 하다. 워낙 텍스트가 거대해 이를 제대로 읽기 위해선 관람객이 오히려 방 안을 돌아다녀야 한다. 

인종·핵·무역·계층 전쟁, 내전, 범죄 등 지구촌 갈등에 대한 작가의 질문과 생각을 꽉 채운 작품으로 길이 28.7m, 폭 5.7m, 높이 18.3m 전시장 벽면과 바닥이 온통 흑백 영어로 가득하다. 바닥에는 영국 작가 조지 오웰 소설 ‘1984’에서 인용한 글귀 ‘만약 당신이 미래의 그림을 원한다면, 인간의 얼굴을 영원히 짓밟는 군화를 상상하라’가 있다. 

타원형 볼록 거울에는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의 수필집 ‘자기만의 방’에서 발췌한 문장 ‘지난 수세기 동안 여성은 남성의 모습을 원래보다 두 배로 확대해 비춰주는 마력을 가진 거울 같은 역할을 해 왔다는 것을 당신은 알고 있다’가 들어가 있다. 울프가 가부장제와 성적 불평등에 맞서 20세기 페미니즘 비평을 연 책의 내용이다. 

울프처럼 크루거도 대표적인 페미니즘 작가로 통한다. 1981년 남성의 시선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을 주제로 ‘무제(당신의 시선이 내 뺨을 때린다)’를 발표하면서 여성주의를 양지로 이끌어냈다. 초기에 작업한, 사진과 텍스트를 일일이 손으로 오려 붙인 페이스트업 작품 16점을 소개한 공간에서는 이러한 그의 철학을 잘 엿볼 수 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아니다(You are not yourself)”, “누구에게 선택의 자유가 있는가(Who is free to choose?)”, “우리는 또 다른 영웅이 필요하지 않다(We don’t need another hero)” 등의 작품들을 통해 여성주의 미술을 이끌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도 작품 세계의 큰 줄기다. ‘나는 쇼핑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shop, therefore I am)’ 같은 문장이 대표적이다. 

또한 전시장에 국한되지 않고 벽화, 신문잡지 기고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 온 작가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아카이브룸은 대중문화와 예술의 경계에서 잡지, 신문, 거리의 광고판, 포스터 등 우리가 생활 가까이에서 접하는 매체를 활용해 대중과 활발히 소통해 온 작가의 작업 세계를 폭넓게 보여준다. 작가의 육성이 담긴 인터뷰 영상, 잡지와 신문에 기고한 작업 등이 마련됐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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