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문화유산 시리즈 2] 수원화성, 정조의 효심이 탄생시킨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꽃
[유네스코 문화유산 시리즈 2] 수원화성, 정조의 효심이 탄생시킨 우리나라 성곽 건축의 꽃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09.06 14:07
  • 호수 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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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모시기 위해 축성… 정약용이 설계하고 둘레만 5.7km에 달해
장안문‧팔당문 등 4대문 웅장… 정조 머물렀던 행궁, 일제때 소실 후 복원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이 탄생시킨 수원 화성은 일제와 한국전쟁에 의해 소실됐지만 ‘화성성역의궤’ 등 옛 사료를 바탕으로 복원, 유네스코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사진은 화성의 4대문 중 최고의 문으로 꼽히는 ‘장안문’. 반원형의 성벽인 옹성이 인상적이다.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이 탄생시킨 수원 화성은 일제와 한국전쟁에 의해 소실됐지만 ‘화성성역의궤’ 등 옛 사료를 바탕으로 복원, 유네스코로부터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사진은 화성의 4대문 중 최고의 문으로 꼽히는 ‘장안문’. 반원형의 성벽인 옹성이 인상적이다.

[백세시대=배성호기자]우리나라 성곽의 꽃이자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에 등재된 수원 화성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향한 정조의 효심과 강력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한 정조의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담겨있는 곳이다. 

정조는 죽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아버지의 릉과 어머니의 릉을 합장하며 ‘융릉’으로 칭하고, 수원으로 옮겼다. 수원은 아버지의 무덤과 함께 태어난 신도시인 셈이다. 정조는 이곳에서 새로운 국가의 꿈을 키웠다. 

정조의 명을 받은 실학자 정약용이 설계하고 채제공이 축성 책임을 맡았다. 1794년에 착공해 1796년에 완공된 화성은 둘레 약 5.7㎞, 성벽 높이 4~6m에 땅속 깊이 1m로 기초를 다졌다. 동서남북에 놓인 창룡문·화서문·팔달문·장안문, 군사를 지휘하는 서장대와 동장대, 5개 포루, 봉돈, 치(치성), 공심돈, 수문, 각루, 노대, 적대, 암문 등 성벽과 모든 건물을 짓는데 걸린 시간은 불과 2년 9개월(장마 등 공사를 못 한 기간을 제하면 약 2년 6개월) 밖에 안 된다.

화성의 4대문 중 최고의 문은 장안문이다. 임금이 사는 북쪽 한양을 향해 세워진 화성의 정문인 장안문은 가장 크고 화려하며, 높은 성곽 출입문 위에 2층 누각으로 구성됐다. 장안문은 출입문인 동시에 군사 시설로 장안문 바깥에는 반원형의 성벽인 옹성이 있다. 옹성은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반원형으로 쌓은 성으로, 진입한 적군을 사방에서 포위해 공격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 시설이기도 하다.

보물 제402호 팔달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남쪽 문으로 남쪽에서 수원으로 진입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정조대왕과 당대 국왕들이 융릉을 가기 위해 이곳을 통과했다고 한다. 팔달문은 모든 곳으로 통한다는 ‘사통팔달’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축성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로 지정됐다. 성문의 바깥에는 반달모양의 옹성을 쌓았는데 이것은 항아리를 반으로 쪼갠 것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성문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가 1978년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그대로 복원한 수원화성 ‘창룡문’(동문).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가 1978년 ‘화성성역의궤’에 실린 그대로 복원한 수원화성 ‘창룡문’(동문).

창룡문은 화성의 4대문 중 동쪽 문이다. 여기서 창룡은 곧 청룡으로 풍수지리상 좌청룡이며 동쪽을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반달모양으로 쌓았는데 장안문, 팔달문과 달리 한쪽을 열어놓았다.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보물 제403호이자 화성 4대문의 서쪽을 담당하는 화서문은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로 지정됐다. 화서문 옹성(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다. 공심돈은 속이 텅 비었다는 뜻으로 지금의 초소 구실을 하던 곳이다. 안에는 계단을 따라 오르내릴 수 있고 층마다 바깥을 향해 총이나 활을 쏠 수 있도록 구멍이 있어 철저한 방어가 가능하도록록 했다.

화성에 세워진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는 북수문과 동북각루를 꼽을 수 있다. 화홍문으로 더 잘 알려진 북수문은 물이 흐르는 수로 위에 지어진 것으로 아치와 어우러진 건물이 아름답다. 북수문 위쪽 구릉에는 동북각루가 있다. 각루는 높은 곳에 설치해 성곽 주위를 감시하던 곳이며, 휴식 공간으로도 사용돼 경치가 뛰어난 곳에 지어졌다. 동북각루 동쪽에는 동암문이 있다. 암문은 평상시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적군이 성으로 침입해 오면 군사들이 몰래 성을 빠져나가 적을 공격하거나 필요한 식량과 물자를 운반하기 위해 세운 군사용 출입문이다.

성곽 동남쪽에는 봉돈이 있다. 봉돈은 봉화(연기와 불)를 통해 정보를 주고받았던 곳으로 서울 남산 봉수대와 같은 기능을 했다. 봉돈에서 밤에는 불을 피워 소식을 전했고, 낮에는 연기로 위급한 소식을 알렸다. 불이나 연기의 숫자에 따라 위급한 정도와 내용이 달랐다. 봉돈 하나에서 연기가 나면 이상이 없다는 것이고, 2개는 적군이 나타났다는 것, 3개는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 4개는 적이 안으로 들어온 것, 5개 모두에서 연기가 나면 전투가 벌어졌다는 뜻이다.

화성하면 빼놓을 수 없는 곳 중 하나는 행궁이다. 행궁이란 임금님이 지방을 둘러보거나 전쟁이나 재난으로 궁궐을 떠나 지방에 머물 때 임시로 사용했던 궁궐을 말한다. 화성행궁은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행궁으로 건립 당시 21개 건물 576칸 규모의 정궁(正宮) 형태로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깃들어 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대부분의 시설이 역사 말살 정책으로 파괴됐다. 그러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해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됐고, 2003년 482칸의 1단계 복원이 완료돼 일반에게 공개됐다. 현재는 2단계 복원공사가 진행 중이다.

정조는 1789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융릉을 옮긴 이후 12년간 13차례 걸쳐 수원에 내려왔고 이때마다 행궁에 머물렀다. 화성 행궁에 가면 정조가 어머니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던 장소와 정조가 업무를 보았던 곳, 옛날 과거 시험을 치렀던 현장을 볼 수 있다. 매년 10월 열리는 정조대왕 능행차(올해는 10월 5~6일)는 이런 정조의 효심을 재현한 행사다.

배성호 기자, 사진=조준우 기자

[유네스코 문화유산 시리즈 1] 종묘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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