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07]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07]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 이 승 철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승인 2019.09.27 13:50
  • 호수 68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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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견고하더라도 

견고하다 하지 마라. 갈다 보면 뚫리는 법이니. 

勿謂堅 (물위견)  磨則穿 (마즉천)

- 이가환(李家煥, 1742-1801), 『금대시문초(錦帶詩文抄)』 하(下) 「윤배유연명(尹配有硏銘)」


윗글은 조선 후기 문인 금대(錦帶) 이가환(李家煥)이 윤배유(尹配有)의 벼루에 쓴 명문(銘文)의 일부이다. 옛사람은 벼루・연적・거울・지팡이 등 생활에 쓰이는 물건에 글을 새겼는데, 대부분 자신을 경계하는 뜻이나 물건의 연혁을 담은 내용이었다. 이 글은 끊임없이 갈다보면 먹이 벼루를 뚫는 것처럼, 아무리 어려운 학업이라도 성실한 자세로 끊임없이 연마하다보면 성취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 커다란 성취를 이룩한 사례는 역사에서 종종 찾을 수 있다. 초서체(草書體)로 일가를 이룬 중국 한나라의 서예가 장지(張芝)는 연못가에서 돌에 글씨를 썼다가 물로 씻기를 수없이 되풀이하여 연못물이 모두 새까맣게 변할 때까지 글씨를 연마하였으며, 추사체로 널리 알려진 조선의 서화가이자 학자인 김정희(金正喜)는 칠십 평생 10개의 벼루를 뚫었고 천 여 자루의 붓을 닳게 할 정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사회는 성실한 노력으로 인한 성취보다는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한탄과 분노만이 가득하다. 개인의 노력으로는 넘어서기가 힘든 사회적 차원의 장벽이 도처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근로 계약 형태에 따른 불평등의 장벽, 성별이나 인종 등 각종 차별의 장벽, 자본의 규모에 따른 불공정 경쟁의 장벽 등 여러 사회적 장벽들이 너무나 공고하게 버티고 서있다.

이러한 사회적 차원의 장벽은 사회 구성원인 개인들에게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심어줄 뿐만 아니라 사회의 선순환 구조를 막아 건전한 사회발전을 저해한다. 우리 사회도 이러한 점을 인지하여 법적・사회적으로 장벽 허물기를 시도하고 있다. 불평등・불공정・차별을 해소하자며 국민들이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고 있으며, 차별을 금지하는 법도 일부 제정되고 있다. 그러나 사회적 장벽이 기득권의 카르텔과 공동체의 인식에 기반하고 있는 탓에 변화는 아직 요원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사회적 장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실한 노력으로 인한 성취를 저해하는 사회적 장벽이 허물어져야 비로소 개인들이 노력을 통해 성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견고하다 하지 말고, 노력하여 허물고 또 허물어 보자. 언젠가는 허물어질 것이다.     

이승철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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