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금요칼럼] 천재 작곡가 김해송
[백세시대 / 금요칼럼] 천재 작곡가 김해송
  • 이동순 한국대중음악힐링센터 대표
  • 승인 2019.10.04 14:33
  • 호수 6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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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곡과 가수 겸했던 김해송은

어려서부터 기타연주에 재능

1937년작 ‘연락선은 떠난다’ 히트

한 해 동안 32곡 작곡도 

6‧25 때 납북돼 아깝게 타계

김해송(金海松)이란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한국가요사에서 싱어송라이터, 즉 작곡과 노래를 함께 겸했던 특이한 사람이 이따금 나타나곤 했었는데, 이 김해송이란 분이 바로 그런 인물 중의 하나입니다. 한 나라의 문화사에서 걸출한 업적을 남긴 문화인들은 그 나라 국민들 기억 속에 오래오래 기억이 되며 사랑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경우는 식민지와 분단의 엄청난 격동과 혼란 속에서 험한 세월의 풍파에 그 존재가 망실되어버린 인물들이 한둘이 아닙니다. 김해송이란 이름이 여러분께 낯설게 느껴지는 까닭도 바로 한국전쟁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김해송! 그는 너무도 뛰어난 가요작곡가이면서 동시에 가수로 활동했었고, 또한 한국의 뮤지컬 역사에서 선구적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의 품성은 항상 재기발랄함 그 자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911년 평남 개천에서 태어난 김해송은 본명이 김송규(金松奎)입니다. 소년 시절 평양 숭실전문을 다니다가 집안의 연고에 따라 충남 공주로 내려와 공주고보를 졸업했습니다. 재학시절부터 기타 연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고, 날이면 날마다 기타만 끌어안고 살았습니다. 전문적 기타연주자가 되고 싶은 꿈에 부풀어 김해송은 조선악극단의 지휘를 맡고 있던 작곡가 손목인을 찾아가 오케레코드사 전속연주자로 발탁이 되었던 것이지요.

1935년은 김해송이 가수로 무대에 처음 데뷔한 해입니다. 당시 24세였던 김해송은 이난영, 신일선, 고복수 등 오케레코드 전속 가수들과 함께 당당히 무대 위에 올랐습니다. 1937년 2월에는 최고의 음악가를 지향하는 청년 김해송에게 있어서 드디어 출세의 기회가 다가왔습니다. 가요곡 ‘연락선은 떠난다’(박영호 작사, 김송규 작곡, 장세정 노래, 오케 1959)를 작곡하여, 평양 출신 가수 장세정으로 하여금 애달프고 눈물겨운 음색으로 취입하도록 했던 것이 바로 그 기회였습니다. 이 노래에 대한 반향은 실로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오케레코드사에서 활동하던 김해송이 콜럼비아사로 옮긴 것은 1938년도의 일입니다. 이 한해 동안 무려 32곡이 넘는 작품을 작곡하거나 불렀습니다. 그 가운데서 특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작품은 김해송이 만요(漫謠)에 대한 각별한 관심과 애착을 갖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개고기 주사’, ‘모던기생점고’, ‘전화일기’, ‘청춘삘딩’ 등의 다양한 만요 작품에 나타난 익살과 풍자는 식민지 현실의 모순과 부조리, 일그러진 근대풍경의 묘사와 반영이 눈물겹게 그려져 있습니다.

이후로 발표했던 김해송의 대표곡 제목을 한번 들어보시겠습니까? ‘옵빠는 풍각쟁이’, ‘팔도장타령’, ‘나무아미타불’, ‘다방의 푸른 꿈’, ‘코스모스 탄식’, ‘우러라 문풍지’, ‘화류춘몽’, ‘잘 있거라 단발령’, ‘어머님 안심하소서’, ‘요즈음 찻집’, ‘경기 나그네’, ‘고향설’ 등 유명곡이 참으로 많기도 많습니다. 이 노래들은 모두 크게 히트를 했던 가요곡들입니다.     

이 시기 김해송의 삶에서 또 하나의 놀라운 소식은 가수 이난영과의 결혼입니다. 김해송은 아내를 위해 재즈풍의 노래 ‘다방의 푸른 꿈’(조명암 작사, 김해송 작곡, 이난영 노래, 오케 12282)을 만들어줍니다. 그러면서 처남 이봉룡에게 작곡 기법을 가르쳐 작곡가로 성공을 시켰습니다. 이 노래는 김해송이 자신의 아내에게 생일축하곡으로 헌정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1930년대 후반, 다방 내부의 풍경이 그림처럼 보이는 듯합니다. 특유의 자유분방하고도 흐느적거리는 가락에서 느낄 수 있듯이 김해송은 미국식 재즈풍 작곡에 매우 익숙한 재능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 ‘황금광시대’ 시리즈에 보면 아련하고도 비감한 재즈 선율이 흘러나오는데, 이것을 식민지 조선의 1930년대 대중음악에서 완벽하게 정착된 재즈 음악으로 경험해볼 수가 있는 것이지요.

1945년 해방과 더불어 김해송은 K.P.K.악단을 조직하여 새롭게 변화된 세상에 기민하게 대응합니다. 해방기념가요 ‘울어라 은방울’도 발표해서 대중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김해송은 북으로 끌려 올라가 영영 소식을 알 수 없게 되었지요. 이처럼 전쟁은 모든 현재성을 소멸과 망각의 구렁텅이로 매몰차게 던져 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김해송이 북으로 끌려가게 된 사연은 K.P.K악단의 직속후배가 해방 직후 미8군 위문공연을 선도했던 악단장 김해송을 인민군 보안대에 찾아가 반동으로 밀고했던 것이 그 주된 배경이라고 합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내 이난영이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던 남편의 행방을 탐문하려고 얼굴에 숯검정을 칠한 채 남복으로 변장하고 수없이 철조망 담장 밖을 배회했건만 기어이 부부는 상면하지 못하고 영원한 이별이 되고 말았지요. 북에서 나온 자료인 ‘민족수난기의 가요들을 더듬어’(최창호, 1997, 평양)에 의하면 납북 이후 열악한 환경 속에서 결핵이 발병하고, 또 폭격으로 심한 부상까지 입었다고 합니다. 전쟁 중에 원산으로 후송되어 병원 치료 중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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