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세시대 / 세상읽기] “노인이 악기를 연주하면 어떻게 될까”
[백세시대 / 세상읽기] “노인이 악기를 연주하면 어떻게 될까”
  • 오현주 기자
  • 승인 2019.10.11 14:45
  • 호수 6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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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매주 토요일 오후 2시면 어김없이 집 부근 교회에 나간다. 하나님도 영접할 겸 첼로를 배우기 위해서다. 

지역마다 ‘우리동네오케스트라’(이하 ‘우리동네’) 활동이 눈에 띈다. ‘뮤직홈’이란 친절한 곳에서 종교단체와 연계해 실비로 각종 악기를 대여해주고 젊은 음악선생을 파견해 교회에서 교습도 한다. 어린이서부터 노인까지 일주일에 두 시간 레슨을 받고 일 년에 두 차례 콘서트 형식의 발표회도 갖는 것. 악기를 집에 가지고 갈 수도 있다.    

기자는 작년여름 교회에 걸린 현수막을 보고 제 발로 걸어 들어가 단원이 됐다. 철들면서부터 악기에 대한 남다른 갈망이 있었던 듯하다. 중학교 때는 학교 밴드부에서 잠깐 활동했다. 실로폰의 일종인 ‘벨 리라’를 쳤다. 당시 효창운동장에서 럭비경기가 열렸다. 양측 학교 밴드부가 동원되고 학생들이 노래와 율동으로 응원에 열을 올렸다. 경기를 마치고 밴드부가 효창동에서 정동까지 빗속에 거리행진을 벌였다. 중학교 1학년이던 기자는 가슴 앞에 악기를 곧추세우고 교가를 연주했다. 

우렁찬 관악기 소리 속에서 명징한 금속음이 지금도 또렷이 들리는 듯하다. 음을 잘못 낼까봐 조마조마하며 힘들게 행진을 마쳤다. 그날 학생모가 비에 흠뻑 젖어 무거웠고 중국음식점에서 다 같이 짜장면을 맛있게 먹었던 일 등이 기억에 새롭다. 비가 오면 짜장면을 찾는 습관이 그날 이후 생겼다. 

‘우리동네’는 첼로, 바이올린, 플루트, 클라리넷 등 4개 악기, 30여명으로 구성됐다. 팝송, 가요, 클래식, 찬송가 등 모든 장르의 음악을 연주한다. 악기 별 인원이 들쭉날쭉하다. 클라리넷은 한두 명에 불과하지만 첼로는 7~8명이다.  초등학생, 주부, 방송기자, 직업여성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음악을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주일마다 모여 호흡을 맞춘다. 

생업에 종사하며 악기를 숙달하는 게 결코 쉽지 않다. 주말마다 같은 시간대를 비우는 일이 물리적으로 힘들 뿐더러 매주 새 곡을 받아 일주일 동안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도 인내와 끈기, 열정 없이는 실현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자도 출장과 야근 등 어쩔 수 없는 사정으로 빠지기 일쑤여서 수시로 중도 포기의 유혹을 받는다. 

최근 ‘우리동네’는 교회에서 발표회를 가졌다. 올해 들어 처음이고 통산 네 번째이다. 첼로 반의 연주곡은 모차르트 ‘마술피리’ 삽입곡, 라데츠키 행진곡, 도레미송, 빌리진, 어벤저스 등 9곡이다. 6개월간 쉼 없이 연습했던 곡들이지만 합주 때마다 틀리고 버벅댄다. 악기라는 게 하루만 손에 잡지 않아도 낯설어지는 속성을 가졌다. 

발표회 당일 가족 단위의 주민 100여명이 참석했다. ‘우리동네’ 단원들은 흰색 상의, 검은색 하의 차림으로 무대에 올라 곡마다 신성한 제례 의식을 치르듯 최선을 다해 연주했다. 초등학생 남매가 첼로이중주로 ‘피노키오’를, 초등학생 자매가 바이올린 2중주로 ‘바람의 빛깔’을 연주하자 주민들이 뜨겁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중학생 3명과 주부 한 명으로 구성된 플루트 반의 ‘하얀 연인들’ ‘허쉬리틀베이비’란 곡이 끝나자 열렬한 호응이 따랐다. 첼로 반의 연주를 들은 한 주민은 “작년에는 연주가 끝날 때까지 무슨 곡인지 모를 정도로 난해(?)했는데 올해는 금방 알 수 있었다.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발표회 마지막 곡을 끝낸 단원들은 마치 해묵은 숙제를 해결한 듯 환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강단의 보면대와 의자들을 치운 후 가족·친지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했다. 이날의 공연을 가능케 해준 스승들에게 감사의 인사도 잊지 않았다.

그날 단원들은 한결같이 성취감과 자긍심 같은 것을 느꼈을 것이다. 기자 역시 무거운 첼로를 등에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며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나이 들어가면서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들이 심드렁해지고 신체의 노화와 무기력에 위축감을 느끼는 노인에게 악기는 삶의 동력을 얻는 영양제 구실을 한다. 

기자는 그러한 의미에서 노인들에게 악기 연주를 권하고 싶다. 직업과 성별, 나이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려 기량을 쌓고 함께 발표회를 갖는 과정에서 시들고 지친 육신에 활력이 되살아나는 ‘육체적 환생’을 혼자서만 느끼기가 아까워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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