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역사관 ‘도성의 수문’ 전… 한양의 물길 책임진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복원
동대문역사관 ‘도성의 수문’ 전… 한양의 물길 책임진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복원
  • 배성호 기자
  • 승인 2019.10.11 15:03
  • 호수 69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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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지문 일대 청계천 주변 물의 흐름 원활히 하기 위해 세운 수문들
일제에 의해 훼손돼 지도서 사라져… 수문의 역할, 역사적 가치 확인
이번 전시는 한양도성 동쪽 물길을 책임졌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의 역사를 조명한다. 사진은 청계천 준설작업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준천계첩’(위)과 청계천 옆에 재현해 놓은 오간수문의 모습.
이번 전시는 한양도성 동쪽 물길을 책임졌던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의 역사를 조명한다. 사진은 청계천 준설작업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준천계첩’(위)과 청계천 옆에 재현해 놓은 오간수문의 모습.

[백세시대=배성호기자]조선왕조의 한양도성 안에서 가장 지대가 낮은 곳은 흥인지문(동대문)이 위치한 청계천 주변이었다. 이로 인해 도성의 물이 이곳으로 흘러들었고 물의 흐름을 원활히 하기 위해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건설했다. 하지만 1907년 일제는 청계천 물을 잘 흐르게 한다는 이유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헐었다. 그렇게 500년간 한양의 물길을 지켜온 두 수문은 자취를 감춘 듯했다. 청계천을 복원하고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조성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성곽 시설물로서 수문의 역할과 물길과의 관계, 그리고 그것의 변화상을 통해 과거 동대문운동장이 위치하고 있었던 한양도성 동쪽 지역의 역사와 장소성을 되돌아보는 ‘도성의 수문’ 전이 서울 중구 동대문역사관에서 열리고 있다. 오는 10월 26일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에서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의 역할과 변화상을 살펴본다.  

오간수문은 조선시대에 청계천 물줄기가 도성을 빠져나가는 지점에 놓인 수문(水門)이다. 다섯 칸(오간)의 수문으로 이뤄졌다는 뜻에서 붙은 이름이다. 마찬가지로 이간수문은 물길이 두 개라는 의미다.

오간수문의 모양은 아치형으로 돼 있다. 앞서 말했듯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만들어진 수문은 성종 12년(1481년)까지만 해도 3개였다. 하지만 후에 몇 차례 증축을 거쳐 5개의 수문으로 확장됐다고 한다.

현재 동대문역 8번출구에서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인 ‘오간수교’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왼쪽에 오간수문을 재현한 것이 있다. 원래는 오간수교 자리에 오간수문이 있었다. 없어진 오간수문 자리에 다리를 놓아 이곳을 오간수교라 한 것이다. 

수문은 사람들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려고 수문마다 쇠창살로 철문을 설치했다. 오간수문도 마찬가지였다. 각 수문의 크기는 1.5m 정도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간수문은 조선시대에 도성 안에서 죄 지은 자가 도성을 빠져나가거나 혹은 밤에 몰래 도성 안으로 잠입하는 통로로 곧잘 이용됐다. 명종 때 전국적으로 사회를 흉흉하게 만들었던 임꺽정의 무리도 도성에 들어와 전옥서(典獄署)를 부수고 도망갈 때 오간수문을 통해 달아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반면 이간수문은 남산에서 흘러내린 물을 청계천으로 흘러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다 일제가 1925년 동대문운동장을 건설할 때 수문의 석재를 스탠드의 기초석으로 사용하면서 훼손됐다. 이후 2008년 동대문운동장 철거 도중 양호한 상태의 유구가 대량 발굴되면서 수문의 하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는 새로 쌓았다. 물길은 흐르지 않지만 복원된 수문은 DDP 알림터 우측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이간수문의 내측과 외측에는 각각 하천을 따라 흐르는 물을 유도하기 위한 날개 형태의 석축시설이 있으며, 수문 내측에는 물가름이 용이하도록 뱃머리 모양의 물가름돌을 놓았다. 바닥에는 상부의 하중을 견디면서 침하를 방지하기 위해 판상석을 정연하게 깔아 놓았다. 이간수문의 높이는 약 4m이며 폭은 3.3m, 길이는 7.4m 정도이다. 

전시에서는 크게 3부분으로 나눠 이러한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의 역사를 살펴본다. 먼저 ‘수문을 쌓다’에서는 한양의 지형적 특색과 물길의 흐름, 그리고 수문의 축성 과정에 대해 소개한다. 내사산(한양의 동서남북을 둘러싼 4개의 산인 낙산, 인왕산, 남산, 북악산 등을 말한다, 內四山)에 둘러싸인 한양은 북쪽과 남쪽에 비해 서쪽과 동쪽의 지세가 상대적으로 낮았다. 이에 각 산에서 발원한 물길은 평탄한 중앙부를 지나 동서로 가로질러 도성 밖으로 빠져나갔다. 산의 능선을 따라 건설된 한양도성의 동쪽에는 물길의 흐름을 관장하기 위한 두 개의 수문을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산으로 둘러싸인 도성 안 물길의 흐름은 옛 지도와 ‘준천사실’(조선 영조 때 한성판윤 홍계희가 기록, 濬川事實) 등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관람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영상으로도 재현해 놓았다.

‘도성의 수문’에서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을 통해 수문의 구조와 역할에 대해 살펴본다. 한양도성의 수문은 성곽 시설물로서 성 밖으로 하천수를 통과시키는 치수(治水)의 역할뿐만 아니라 외부에서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한 방어의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전시에서는 오간수문과 이간수문에 얽힌 임꺽정의 일화 등을 함께 소개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는다.

마지막 ‘근대기 수문의 변화’에서는 20세기 이후 나타나는 수문의 훼철‧발굴‧복원의 역사에 대해 소개한다. 일제강점기 한양도성의 훼철과 함께 수문도 큰 변화를 겪었다. 교통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오간수문이 철거됐고, 동대문운동장의 건립으로 이간수문이 훼철됐다. 지도 위에서 사라졌던 수문은 2000년대 발굴조사를 통해 그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사라졌다 다시 나타난 수문의 모습은 근대기 지도와 사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오간수문과 이간수문 터에서 발굴된 철책문, 이음새 등의 유물도 함께 소개된다.

배성호 기자 bsh@100ss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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