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09] 대지의 끝, 지평선으로 난 길 위에서
마음을 여는 고전의 향기 [109] 대지의 끝, 지평선으로 난 길 위에서
  • 이기찬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 승인 2019.10.25 13:40
  • 호수 6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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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지의 끝, 지평선으로 난 길 위에서

천하 선비 하나같이 근심 안고 살거늘

수곡은 어찌하여 홀로 즐거워하는가

세상 밖 자연과는 한가히 연 맺으면서

세간엔 누대 하나 세울 땅이 없었구려

공무를 마치고서 잠시 여가 날 때마다

도처에 호수와 산 안팎으로 펼쳐졌네

모름지기 알아야지 주자가 호기 발한게

탁주 두세 잔과는 아무 상관없다는 걸

滿天下士多憂者 (만천하사다우자)

樹谷何爲獨樂哉 (수곡하위독락재)

物外有緣閒水竹 (물외유연한수죽)

世間無地起樓臺 (세간무지기루대)

暫時朱墨優餘了 (잠시주묵우여료) 

到處湖山表裏開 (도처호산표리개) 

須識晦翁豪氣發 (수식회옹호기발) 

非關濁酒二三杯 (비관탁주이삼배) 

- 송시열 (宋時烈, 1607~1689), 『송자대전(宋子大全)』 권4 「수곡(樹谷)의 유산시(遊山詩)에 추후 차운하다」


위의 시는 우암(尤庵) 송시열이 수곡 조세환(趙世煥, 1615~1683)의 인간됨에 대해 쓴 시이다. 내용에서 보듯, 수곡은 낙천적이고, 가난하되 청렴하며, 자주 어디론가 떠나는 방랑벽이 있는 사람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전도양양한 청년이었으나 삼전도(三田渡)의 치욕을 듣고는 과감히 벼슬에 대한 뜻을 접는다. 23년 동안 고향에서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때로는 산천을 떠돌며 여행하다가 42세가 되어서야 대과에 장원급제하며 벼슬길에 오른다.

우암은 위의 시뿐만 아니라 수곡에 대한 시를 몇 편 더 썼는데, 거기에도 그에 대한 한결같은 존모의 염이 담겨 있다. 수사(修辭)를 살려 정리하자면 이러하다. “그는 형산(衡山)의 운무를 개게 한 한유(韓愈)의 호방한 기운과 900리 호수 운몽택(雲夢澤)보다 더 넓은 가슴을 지녔다. 자유자재로 시를 짓는 타고난 시인이며, 누구와도 정겹게 담소를 나누는 여유로운 사람이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탄식하는 소리 한 마디 내는 법 없고, 풍광 속을 노닌 그의 얘기를 듣다보면 드넓은 대지를 가슴에 품은 듯 느껴지곤 한다”는 것이다. 한 인간에 대한 묘사치고는 더할 수 없는 찬탄이다.

『목민심서』에도 그의 인간됨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동래 부사로 재직할 때, 그는 자신의 녹봉을 모조리 털어 백성들의 세금을 대납해 주었는가 하면, 숙종이 그의 가난을 걱정하여 금(金)을 하사하자, 그것마저도 임진왜란 때 순절한 송상현(宋象賢)의 사당을 보수하는 데 썼고, 그때 함께 순절한 관노 석매(石邁)의 자손을 양민으로 만들기 위한 대속(代贖) 비용으로 썼다고 한다. ‘세간에 누대 하나 세울 땅이 없었다’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는 이런 청빈과 넉넉한 품을 지니게 되었을까? 이 시의 마지막 연에 그 답이 숨어 있다. 주자(朱子)의 시 <술에 취해 축융봉을 내려오며[醉下祝融峯]>에 이런 구절이 있다. “내 만리에 장풍을 타고 오니 깊은 계곡 층층구름 가슴이 탁 트이네. 탁주 세 잔에 호기가 발동하여 낭랑히 시 읊으며 나는 듯 산을 내려오네.[我來萬里駕長風, 絕壑層雲許盪胸. 濁酒三杯豪氣發, 朗吟飛下祝融峯.]”라는 대목이다. 주자는 탁주 세 잔에 호기가 발동했다고 했지만, 우암이 보기에 그 흥취는 술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그것은 바로 공자(孔子)의 이른바 ‘인자요산(仁者樂山)’의 의미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중략)

수곡이 걸었던 굽이굽이 휘돈 수많은 산길과 오랜 방랑길이, 그 길 위에서의 고난과 위기가, 그 뒤에 왔을 충만한 여유와 깨달음의 여정들이 그를 인자로 만들었다는 의미일 것이다.(하략)    

이 기 찬 한국고전번역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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