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가족들 덕수궁서 색칠하며 웃음꽃…미술관 나들이 프로그램 ‘일상예찬’
치매가족들 덕수궁서 색칠하며 웃음꽃…미술관 나들이 프로그램 ‘일상예찬’
  • 이수연 기자
  • 승인 2019.11.01 13:41
  • 호수 69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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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환자‧보호자 모처럼 즐거운 시간
지난 10월 23일 대한치매학회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한 ‘일상예찬’ 프로그램에 참가한 오산시 치매안심센터의 치매 환자와 보호자들이 덕수궁 정관헌 앞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은 치매 환자와 보호자가 준비된 그림에 색칠하고 있는 모습.
지난 10월 23일 대한치매학회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한 ‘일상예찬’ 프로그램에 참가한 오산시 치매안심센터의 치매 환자와 보호자들이 덕수궁 정관헌 앞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사진은 치매 환자와 보호자가 준비된 그림에 색칠하고 있는 모습.

대한치매학회-국립현대미술관 공동주관…“예술품 보며 감정 교류”

보호자들 “편안하게 외출할 수 있는 것만도 감사…사회가 더 관심을”

[백세시대=이수연기자]“우리가 마주보고 있는 건물이 석조전인데요. 건물 위쪽에 새긴 꽃문양 보이시나요? 저 꽃이 뭔지 아는 분 계세요?”

“무궁화? 벚꽃?”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오얏꽃이에요. 오얏꽃은 이(李) 씨를 나타내는 꽃으로 조선 황실을 상징하는 꽃입니다. 석조전은 황제가 일상생활을 하면서 손님을 맞던 곳이에요. 화재 위험을 막기 위해서 돌로 지었고, 1919년 고종 황제가 세상을 떠나면서 일본 그림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사용되기도 했어요.”

큐레이터의 설명에 참가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건축물을 유심히 바라본다. 10월 23일, 덕수궁으로 떠나는 일상예찬 프로그램에 참가한 사람들은 경기 오산시 치매안심센터에 다니는 치매 환자와 보호자 20명이다. 치매 환자와 그 가족들은 이날 덕수궁의 건축물들에 관한 설명을 들으며, 덕수궁 곳곳에 설치된 예술 작품들을 체험했다. 

일상예찬은 대한치매학회와 국립현대미술관이 주관하는 프로그램이다. 외출이 어려운 치매 환자와 보호자들에게 나들이할 여건을 마련해주고, 미술관과 연계된 체험 등을 즐길 수 있도록 한다. 올해 일상예찬은 5월에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진행되었고, 7월에는 서울관에서, 10월엔 덕수궁관에서 마지막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참여자들은 덕수궁 산책 후 대추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준비된 건축물 그림에 색칠하는 활동을 한다. 이날 프로그램은 덕수궁 광명문과 덕흥전, 중화전과 석조전, 정환헌을 둘러보며 건축물에 관한 설명을 듣고, 덕흥전 앞에 설치된 작품 <전환기의 황제를 위한 가구>와 중화전 앞에 설치된 작품 <대한연향>을 체험할 수 있는 시간도 마련됐다. 덕수궁의 자연 환경을 즐기고, 평소 보지 못했던 색다른 미술품을 체험하면서 치매 환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보호자들에게도 색다른 시간을 선물할 수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교육문화과 홍해지 에듀케이터는 “환자와 가족들이 24시간 함께 있어도 얼굴을 마주보거나 손을 잡고 걷는 등 감정을 교류하는 시간이 없다”며 “미술품을 보고 느끼면서 평소 하지 못했던 대화를 할 수 있고, 스킨십을 통해 감정적인 교류가 일어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말했다. 

◇“함께 돌봐줄 사람 주변에 많았으면…”

“이제 집에 가자.”

프로그램이 시작된 지 30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한 치매 어르신이 아내에게 집에 가자고 보채기 시작한다. 장 어르신(72)의 남편이었다. 장 어르신의 남편이 치매 판정을 받은 건 5년 전이다. 남편 명의의 똑같은 예금 통장이 계속 쌓이는 게 이상해서 검진을 받았는데, 치매 초기 판정을 받았다. 장 어르신은 “판정을 받고 곧바로 치료를 시작해서 괜찮아진 것 같다”며 “좋아지지는 않지만, 크게 나빠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처음엔 남편이 치매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혹시라도 소문이 날까 두려워 치매안심센터 차량을 이용하는 남편을 아파트 단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타고 내리게 했다. 그러다 치매안심센터에서 운영하는 가족모임에 나가게 됐고,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씩 남편의 상태를 받아들이게 됐다. 장 어르신은 “받아들이고 나니 한결 편하다”며 “무엇보다 아파트 단지 사람들이 같이 돌봐준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고 말했다. 혼자 배회하는 남편을 보고 ‘아저씨 저기 간다’고 일부러 찾아와 말해주거나 전화로 알려주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치매에 걸린 어머니와 함께 프로그램에 참가한 명순희(60) 씨도 “주변에 함께 돌봐줄 사람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명 씨는 1년 6개월여 전 동생과 3층 주택에 한 층씩 나눠 살며 어머니,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어머니는 알츠하이머성 치매이고, 아버지는 혈관성 치매를 앓고 있다. 거동이 자유로운 어머니와 달리 아버지는 휠체어로 움직인다. 이날 프로그램은 명 씨와 어머니만 참석하고, 휴가를 낸 동생이 집에서 아버지를 돌보고 있다. 교사로 재직 중인 동생은 쉬는 날이나 퇴근 후에 부모님을 돌보고, 종일 함께 있는 건 명 씨다. 

어머니는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만 해도 지금처럼 긴 시간 한 곳에 앉아 있지도 못했는데 명 씨 있는 곳으로 이사온 뒤 호전되기 시작했다. 동생이 혼자 부모님을 모실 때는 동생에게 무조건 “참으라”는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자신이 많은 시간 치매 어머니를 돌보다보니 화가 나고 답답한 날이 많았다. 

함께 있으면 답답한데, 잠깐이라도 외출하려고 하면 또 온 신경이 부모님에게 쏠려 있다. 

누구에게도 마음 편하게 맡길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걱정이다. 명 씨는 “가족‧친척이 모여 살던 옛날 문화였으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생각한다”며 “치매 환자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고, 치매안심마을 같은 제도가 활성화되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편안한 맘으로 외출한 게 얼마만인지…”

그림에 색칠하는 시간이 되자 나란히 앉은 보호자와 환자들 사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무엇보다 가족들은 환자와 함께 편안한 마음으로 외출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은다. 

치매 환자들은 집과 치매안심센터를 오고가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한 환자를 보호자 한 명이 돌본다면, 보호자의 하루 역시 치매 환자의 일정에 맞춰 짜일 수밖에 없다. 외출 한 번을 하려고 해도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기 때문에 엄두를 내기 어렵다. 그러다 보니 보호자들의 생활 반경은 좁아지고, 무기력증이나 우울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건국대학교병원 신경과 문연실 교수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보호자가 90% 가까이 된다”며 “환자가 보호자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24시간 환자와 보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특히 나이가 많은 환자일수록 치매안심센터에 가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사람들과 함께 치료받는 것을 부끄러워하거나, 혹시라도 남 앞에서 틀리거나 잘못하는 게 창피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실제로 환자를 위한 프로그램은 계속 개발되고 있지만, 프로그램이 제대로 활용되질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전체에서 치매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프로그램을 제대로 운영할 만한 인력 또한 필요하다는 게 문 교수의 설명이다. 

오전 10시 30분에 시작한 ‘일상예찬’ 프로그램은 오후 12시까지 이어졌다. 내년에도 봄, 여름, 가을에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대한치매학회 김승현 이사장(한양대병원 신경과 교수)은 “일상예찬 프로그램을 통해 치매 환자와 보호자가 사회적 활동에 자신감을 갖게 되고, 치매 증상이 악화되지 않도록 돕겠다”고 말했다. 

명순희 씨는 “덕수궁에 처음 온 것 같다며 기뻐하는 엄마를 보니 마음이 좋다”며 “보호자도 안심하고 다닐 수 있는 프로그램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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